아빠, 꽤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나 여기 떠나려고 해.
왜 떠나냐고?
그냥. 엄마네 집도 할머니 집도 다 내 집은 아닌 거 같아.
그런 기분이 들어. 그리고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또 뭔가를 해야지.
나도 이제 어른이니까.
그래서 어디 갈 거냐고?
글쎄. 아빠는 내가 어디로 갔으면 좋겠어?
나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어.. 나는... 일본이 그렇게 가고 싶더라고.
왠지 그 나라 정서가 나랑 잘 맞을 거 같아서.
근데 비자받기가 쉽지 않대.
아니면 한국 갈까? 가면 고모도 만날 수 있는데.
아니.. 국제결혼은 말고.
갈 수 있는 방법이야 많지.
근데 국제결혼 얘기하니까 갑자기 그 생각이 나네..ㅎㅎ
고모가 나 중학교 막 졸업할 때쯤 한국 갔잖아. 결혼비자로.
거기서 결혼식 올리고 애도 낳고 잘 산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날 외할머니가 날 찾아온 거야.
나 외할머니랑 별로 안 친한데 와서는 막 나한테 그러는 거야.
너도 얼른 고모한테 한국남자 소개받아서 시집가라고. 그래서 너희 엄마 초청해 가라고.
그래야 너네 식구 다 같이 잘 살 수 있다며, 불쌍한 너희 엄마 생각해서라도 한 번 고민해 보라고 일장연설을 하고 가셨어. 그 뒤로도 잊을만하면 찾아오셨는데 신기한 건 꼭 내가 집에 혼자 있을 때만 오시더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나한텐 전혀 와닿지 않은 얘기인 데다 시집갈 나이도 아니었고.
근데 웃긴 건 아빠, 사람이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잖아 그게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소리일지라도 어느 순간 세뇌가 되는 것 같아.
어느 날부턴가 자꾸 엄마가 신경 쓰이고 걱정이 되더라고. 어려서부터 엄마에 대한 좋은 얘긴 하나도 못 듣고 자랐는데도 말이야.
누가 나한테 좋은 소리 해줬겠어.
아빠가 그렇게 가고 나서 내 귀에 들리는 건 죄다 엄마에 대한 욕뿐이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우리 엄마인 줄 알고 자랐거든 내가.
그러고 보니까 외할머니가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준 건 확실한거 같아.
아니다, 아주 커다란 영향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달러뭉치를 통째로 들고 엄마를 찾아갈 수 있겠어.
그 험난함을 뚫고.ㅎㅎ
암튼 엄마에 대한 감정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워.
밉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가슴 아프기도 하고 그래.
근데 엄마를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게
그러면 왠지 아빠의 엄마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
날 키워준 할머니와 엄마사이에서 이제 그만 방황하려고.
그래서 떠나려고 해.
그곳이 어디든.
아빠, 우리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