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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러클양 Nov 20. 2017

모두 다 이름에 불과할 뿐

유럽의 서머타임이 끝난 것에 대한 감상

지난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2017년 유럽의 서머타임이 끝났다. 이제 겨울이 시작된다는 뜻.


서머타임이 끝났을 뿐인데, 마치 겨울이 왔음을 드러내듯이 불과 한 달 전만해도 저녁 7시 넘어 저물던 해가 이제는 5시도 안되어 저물기 시작하고, 6시도 되지 않았는데 창밖은 어두워진다. 날이 하루 바뀌고, 서머타임이 끝났을 뿐인데, 천체현상까지 바뀐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태양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같은 위치에 있고, 지구 역시 과거 45억년을 돌았던 궤도를 변함없이 돌고 있다. 그러니 단 하루 사이에 해가 뜨고 지는 "객관적인" 시간이 바뀌었을리 없다. 바뀐것은 다만 인간이 정한 기준일 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해는 저녁 7시에 떠서 아침 6시에 질 수도 있고,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질 수도 있다. "아침, 점심, 저녁" 이라는 시간의 기준,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이라는 방향의 기준은 모두 인간이 이름붙인 것에 불과하다. 즉 우리가 동쪽으로 부르던 서쪽으로 부르던 상관없이 해가 뜨는 방향은 일정하고, 우리가 저녁 7시로 부르던, 아침 6시로 부르던 상관없이 해가 뜨고 지는 시간도 일정하다. 다만 변하는 것은 우리가 정한 기준이고 우리가 붙인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선생님께 해석학개론을 들을 때, 선생님께서 항상 해주신 말씀이 게오르크 칸토어의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Das Wesen der Mathematik liegt in ihrer Freiheit)."는 말이었다. 즉 가장 논리적으로 엄밀하고 정치한 학문인 수학에서조차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은 신이 정해준 절대적이고 불변의 기준이 아니라, 단지 인간들의 약속에 의한 것으로 논리적인 정합성만 유지된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리체계까지 뒤흔들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불교 경전에도 나온다. 금강경을 보면 붓다가 제자인 수보리에게 "법이라는 것은 곧 법이 아니니 그 이름이 다만 법이고, 보살이라는 것도 곧 보살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보살이며, 불국토도 또한 불국토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불국토"라 설법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어떤 고정된 실체 혹은 불변의 진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고정된 실체나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이름붙여 부르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야기가 장황하게 흘러갔는데, 결국 서머타임이라는 것,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라는 것도 다만 인간인 우리가 그리 이름붙여 부르는 것일 뿐, 정해진 실체나 법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한국에서 지난 1988년에 올림픽을 앞두고 서머타임제도를 실시했다가 올림픽이 끝남과 동시에 환원한 것처럼.

우리는 생각 밖으로 우리가 정한 이름과 개념들에 의해 강하게 구속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의외로 또 그 이름과 개념들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생각이 법이나 윤리나 학문에 있어서까지 무조건적인 상대주의나 실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가 이름붙여 부름과 그와 연결되는 인식에 대한 아주 부주의하고 서툰 생각일 뿐이다.


사진은 위트레흐트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 테라스에서 본 석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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