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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러클양 Nov 21. 2017

자크 루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회화

가부장적 국가주의 프로파간다인가 혹은 영웅적 삶의 재현자인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층에 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나리자 말고, 내 시선과 관심을 끄는 작품이 세 점 있다. 모두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인데, 각각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사비니 여인의 중재', 그리고 '테르모필라이에서의 레오니다스'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살롱전에서 입상한 영광의 작품이지만 동시에 프랑스 인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가부장적 국가주의 인식을 심어준 회화의 대표작이 첫 번째 작품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다. 기원전 7세기 라틴족 도시국가 연합체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로마와 알바 롱가는 전쟁을 하는데, 시민들을 전투에 내모는 대신 각 가문별 대표 셋이 나와 결투를 하는 것으로 승부를 내기로 한다. 이에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삼형제가 대표로 나가게 되었고, 알바 롱가에서는 큐라티우스 가문의 삼형제가 대표로 나서게 되었다. 비극의 씨앗은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이 큐라티우스 가문의 아들과 약혼한 사이라는데서 비롯된다. 그림을 보면 호라티우스 가문 삼형제는 로마식 경례를 하며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고, 그 셋은 서로 굳세게 끌어안고 형제애를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에 있는 가부장인 호라티우스 가문의 아버지는 칼 세자루를 주며 아들들의 애국심과 명예를 칭송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오른편에서는 어머니와 며느리와 딸이 죽을 운명에 나갈 아들과 남편과 오빠 혹은 장래의 남편이 죽을지도 모를 일에 비탄에 빠져있다.

이 그림은 가부장적 국가주의의 극치인 동시에, “사사로운 자신을 잊고 국가에 헌신하는 남성”과 “그와 상관없이 개인적인 비탄에 빠지는 나약한 여성” 이라는 이중의 고정된 틀이 씌워진 프로파간다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애국심과 멸사봉공을 칭찬하며 그 가문의 나약한 여성들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포인트는 그게 아니다. 문제의 포인트는 "국가를 위함" 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개인을 희생시키는 가부장적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프로파간다는 두 번째 작품인 '사비니 여인의 중재'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로물루스 건국 초기 양치기와 사냥꾼들의 조악한 집단에 불과한 로마는 여성이 없어 가족을 꾸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로물루스는 이웃 사비니족을 모두 초대한 후, 그가 신호를 하면 사비니족 여인들을 강간하도록 시킨다. 딸 혹은 동생을 로마에게 기습적으로 빼앗긴 사비니족은 로마에 전쟁을 선포하고, 둘은 싸우는데, 남편 혹은 아버지나 오빠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사비니족 여인들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이 전쟁을 중재한다. 이 역시 국가주의 프로파간다와 국가의 목적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바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나있다. 이 작품에서 문제는 역시 사람을 국가의 도구로 간주하는 생각이다.

마지막 테르모필라이의 레오니다스는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할 필요없이 그 이야기 자체가 국가주의 프로파간다다.

이처럼 "위대한 가부장적 질서체제로서의 국가"와 "그에 기꺼이 희생해야 하는 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은 신고전주의 회화의 형식적 절정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개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즉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은 형식면에 있어서는 루브르에 전시될만큼 훌륭한 그림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정권의 찌라시"라 불리는 언론 기사와 크게 다를바 없는 것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가부장적 국가주의 프로파간다의 절정을 보여준다.
사비니 여인의 중재
테르모필라이의 레오니다스. 영화 “300”의 그 레오니다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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