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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Dec 25. 2022

크리스마스에 적은 일기

돌아보는 2022년 그리고 나

생각보다 올해 잘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과거가 밉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며 나의 미래가 기대될 때.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 언저리에, 완전히 다른 두 사람으로부터 나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명은 찻집에서 함께 일하는 동생이었고, 한 명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막 돌아온 한 학번 위 선배였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표현해도 다 받아들일 자신이 있는 만큼 편하면서도 진득한 사이였다.



 얼마 전 사소한 것에 매몰되어 하루이틀을 앓던 와중, 무지해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나 자신이 싫어 지나가는 식으로 동생에게 두어 마디 토로했던 적이 있다. 너무 멍청한 것 같다고. 그때가 아마 새벽 3시인가 4시쯤이었는데, 몇 분 간격을 두고 계속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그 연락과 연락 사이의 텀에서 동생의 애정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지나가듯이 툭 내뱉은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위로를 한 아름 안겨주는 친구가 어디 있을까.


 내가 일하는 찻집에서는 2주에 한 번씩 자유 주제로 대화를 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이번 주 주제가 바로 '사랑'이었는데, 이 대화 프로젝트에 참여한 동생은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랑으로 '이 찻집에서 만난 언니들'이라고 대답했다. 나 역시 올해 사랑이 가득한 너를 만나게 되어 다정한 나날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위 이야기를 꺼냈다. 사소한 것에도 다정히 신경 써주는 이 친구의 섬세함에 놀랐다고, 그러자 동생은 말했다. "언니는 언니가 늘 무던하다고, 늘 감정이 수평선을 유지한다고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아니거든요... 무언가를 보고 느끼는 감정의 폭이 남들보다 다른 것 같아요. 하나를 바라볼 때도 더 파고드는 게 있는 것 같고요... 영화나 연극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느끼기엔 그랬어요. 그래서 언니가 혼자 있으면 너무 힘들어할 것 같아 계속 신경이 쓰여서 그런 거였어요."


 내가 외면하고 있던 점을 시원하게 긁어준 것 같아서 적잖이 놀랐다. 늘 남들에게 내 자신을 소개할 때도 무던하고 잔잔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되고 싶은 나'가 ‘진짜 나’라며 꾸준히 말해온 것 같다. 무언가 보고 나면 요동치는 감정들을 기록으로 잘 갈무리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는데, '늘 기록하고 있는 네가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라는 말을 종종 듣다 보니 내가 유별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자주 했다. 동생이 담아낸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어떤 조언이나 위로보다 큰 힘이 됐다.


 이스탄불에서 10개월의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선배는 서울에 잠깐 올라와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소중한 날 나를 만났다. 학과가 워낙 특수하다 보니 선배들의 두툼한 경험을 듣는 것이 제법 큰 도움이 된다. 선배는 튀르키예에 머물렀을 때부터, 나의 교환학생 생활이 그 누구보다 기대된다는 말을 자주 전했다. 내가 기록으로 담아낼 튀르키예의 이모저모가 궁금하다고 했다. 너는 하나를 보더라도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니 타지에서 겪는 경험을 다채롭게 느끼고 오라는 것. 예측 불가하고 힘든 일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네가 가진 풍부한 감상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선배가 가져온 선물


 선배는 이스탄불에서 사 온 고양이 엽서에 이렇게 적었다. "내년 상반기는 그냥 경험, 추억을 넘어서 너의 자산이 될 거야. 그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테니까 그냥 네가 최대한 터키를 사랑하다가 왔으면 좋겠어. (...) 네가 뭘 얻을지 너무 기대돼. 터키에서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하고, 조그만 인맥 총동원해 줄게. 후배의 특권을 누리렴." 이스탄불에서 사용 가능한 교통카드가 담긴 동전지갑부터, 각종 기념품들까지 한아름. 곧 그곳으로 떠나는 사람에게 이런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선물을 받게 되다니 아무래도 나, 적지만 그 속에서 단단한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것 같다.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서투른 적도 많았고, 조급한 마음에 앞서나가다 각종 일들이 뒤엉킨 적도 있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병을 얻어 대학병원을 오가야 했고, 오랜 신뢰로 이어온 알바 역시 썩 달갑지 않게 퇴사해야 했다. 힘들었다면 힘들었지만, 지나온 날을 생각했을 때 보람찼다면 보람차기도 했다.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를 조금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행운은 찾아왔다. 그 과정에서 '나'를 잘 알게 되는 한 해였다.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기록으로 채워나갈 때 비로소 더 나은 내가 됐다. 그 속에서 다시 한번 주변 사람들의 좋은 말들로 나에 대한 의심이 확신이 되었을 때 브런치에 글을 쓸 기회가 찾아왔으며,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내 글이 입증되어 보상을 갖는 시간들을 가졌다. 이 과정은 분명 순탄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할지, 어떤 세상을 담아내고 싶은 사람인지 알게 해주었다. 올해도 여러가지 선택을 해야했는데, 내 선택에 먼 훗날까지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다행인 일이다.


 내년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거점지에서 오랜 시간 홀로 머무르지만, 그곳에서 또 어떤 새로움을 맞이하게 될지 설렌다. 가기 전에 아직 쓰고 싶은 글이 많고, 만나야 할 소중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빨리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멈칫하게 되는 이유다. 2023년도 여러 의미로 뜻깊은 한 해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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