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다시 일상으로.

끝맺음과 시작 사이에서

by yan

서울에 돌아오고 일주일 간 정말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냈다. 지금이 불행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응이 안 될 정도의 빠른 인터넷 속도, 데이터가 터지고 에어컨이 나오는 쾌적한 지하철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물이 근래 당연했던 적이 없다. 신기함과 소중함 그 사이 어디에선가 푹 우러나오던 소박한 행복들, 그건 일종의 쾌락이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서 온다더니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지지 않은 순간적인 짜릿함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당연히 무뎌져갔다.


안탈리아에서 만났던 독특한 아저씨들.


나는 지난 6개월 간 피곤하다 싶을 정도로 튀르키예 길거리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삶의 형태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모든 삶의 태도를 잊지 못할 것이다. 환대 문화에서 우러나오던 다정함부터 웃음밖에 안 나올 정도로 황당하던 무례함까지 모조리 싹 다. 성장이고 뭐고 그냥 생각을 조금 덜어낸 채 가볍게, 재미있게 사는 방법 하나를 깨우치고 가는 듯했다. 조금 더 둥글고 단순해지는 것. 생각의 꼬리를 무는 행위를 그만두는 것. 그리고 더 이상 어딘가에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설명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 삶의 재미는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내려놓을 때 나오는 거구나. 이런 나의 조잘거림을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친구가 그 단순함을 배워가던 모든 과정이 가장 큰 성장이라고 짚어주었다.


이건 튀르키예 길개들의 평범한 삶


다양한 삶의 형태에 거침없이 다가서는 용기는 여전히 지속하고 싶어졌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누군가가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삶은 진한 여운을 남길 정도로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해외 생활의 막바지가 될수록 마음 한편에 덜컥 겁이 났다. 서울로 돌아간다면 내가 쌓아둔 세상 속에서 또 조용히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살아갈 게 눈에 선했다. 누군가는 이 흐릿한 나의 두려움과 아쉬움에 이렇게 답했다. '너는 독립적인 삶을 선호해 왔으면서도 내 눈엔 언제나, 늘 소통을 중시하고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가... 다만 '외국인'이고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전제가 소통이라는 후자를 더 특별하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대부분은 그냥 스쳐갈 초면인 사람들과의 대화는 아무래도 남들보다 수월할 것이며, 그렇게 넓힌 시야의 짜릿함을 느끼는 게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니었으려나. 자유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꾸 휴가가 나거나 방학이 되면 멀리 훌쩍 떠나는지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면 더 이상 일상 속에서 눈이 탁 트이는 새로운 경험은 하기 어렵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말 이젠 새로운 세상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특정한 시기에 새로운 곳들을 탐색하는 일은 권장할 일이 맞는 것 같다. 나한테는 그 시기가 교환 생활에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시야를 넓힐 생각은 없었으면서도 가끔 가성비라는 단어가 아까울 정도로 귀중한 경험을 안겨준 학교가 고맙기도 하다. 그러니까 앞서 말했듯 내가 바란 삶의 태도는 한국이라는 사회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알려주는 게 아니다. 여행길 위를 걸었던 나날들이 쌓이고 쌓여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나의 태도였다. (밀린 여행기들은 시간이 될 때마다 차곡차곡 정리해 볼 예정이다. 경험의 기록은 아주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이건 다짐 겸 포부다!)


귀국과 친구의 소중한 환영


서울로 돌아온 지 3주, 6개월 간 행복에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았던 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 인천행 비행기를 탑승한 순간부터 쉴 틈 없이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한국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적응이 안 됐다면, 3주가 지난 지금은 그 언어로 이루어진 ‘쏟아지는 방대한 정보'에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할 때다. ‘돌아오자마자’ 나라는 사건 사고들이 많았고 날씨는 여전히 좋지 못했으며 도파민에 중독된 사람들은 모든 논쟁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한국인이 확실히 한국에 있으니 피부로 와닿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구구절절 말했던 ‘여행길 위 삶의 태도’는 그저 적절한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해외 생활 중에도 밝지만은 않은 일들이 많았다. 유럽 여행 중 샤워를 하다 갑자기 단수되면 그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하고 있어서라고 했다. 5개월 간 함께 어학당 수업을 들었던 17살 러시아인 알리는 그 전쟁 징집을 피해 튀르키예로 내려와 대학 진학을 목표하고 있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피해 온 메흐멧이 늘 들려주는 탈레반 정부와 실태들은 충격에 듣기가 힘들었다. 국적이 다 다른 우리는 늘 이 정도 피상적인 팩트의 오고 감에서 멈췄지 한 숟갈의 감정도 얹지 않고 더 깊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튀르키예는 폭락하는 리라 환율에 오늘내일 가격이 달라졌고 메뉴판 가격은 보드마카를 통해 쓰고 지워졌다. 관광객들은 환호하며 몰려들었고 내 또래 젊은 세대들은 그 사실에도 힘들어했다. (심지어 내가 아는 대다수 튀르키예의 지인들은 편향된 언론에 눈과 귀를 막은 지 오래였다.) 모든 세상이 아주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던 나날이었다. 내가 경험한 세상을 나만이 할 수 있는 말로 잇고 전하고 싶다는 꿈이 생겨났다.


한국, 커피값이 비싸 다소 놀랐다.


그런데 근래 한국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카페에서 일상만을 얘기하는데도 커다란 에너지 소모를 느꼈다. 온갖 머릿속을 헤집으며 튀르키예어로 말했던 그 모든 소소했던 대화들보다 이 모국어로 하는 깊은 이야기들에 더 큰 소모를. 사실 전부 필요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고 복잡한 일상을 거치고 있었다.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총집합이 삶이라지만 세상엔 너무나 다양한 사람이 많고 일상 속에서 정말 별 일이 다 일어난다는 걸 느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엔 침묵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게 말대로 쉽게 되는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진정성을 호소하면 그걸 정확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타인을 향한 시비와 공격의 대부분은 열등감에서 튀어나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이제 그 열등감이 내가 느끼기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감정이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범죄자에 지겹도록 서사를 부여하고 사건의 젠더 갈라 치기로 또 다른 갈등을 양산한다.



그저 튀르키예에서의 나와, 한국에서의 나를 잠시 구분 지어놓아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조금 아픈 말이지만 전생과 현생, 꿈과 현실처럼. 모국에서는 나를 위해서라도 논리의 힘을 더 키우고 말랑해진 생각의 근육을 꾸준히 길러야 한다. 패턴화 된 작은 행복들을 만들어가며 무력감과 두려움을 주는 소식들 사이에서 버텨야 한다. 그러니 그 가볍지만 소중했던 튀르키예식 배움은 꼭 간직한 채 다시 묵직해져 보자. 남은 하반기도 잘 지낼 수 있기를, 파이팅!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