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끝끝내 작게 만들어버릴 그곳을 찾아서
2019년 8월, 나*는 도쿄에서 비행기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져있는 코우치로 향했다.한 와시(和紙, 화지) 장인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맑은 물을 사용해 만들어야 질 좋은 종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와시가 만들어지는 현장은 깊은 산 속 오지에 있다.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연수를 받고 싶어도 숙소가 여의치 않던 와중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방문객을 대상으로 맞춤 워크숍을 진행해주는 카미코야(かみこや)를 발견한 것이다. 요즘 종이를 만들고 있다고 안부를 전하니 오랜만에 만난 D&department의 A상이 귀띔해준 곳이었다.
*나는 현재 일본의 한 미대 대학원에서 텍스타일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 전문분야는 종이로, 2018년 여름 쯤부터 원료를 가공하여 직접 종이를 만들고 있다. 실제 쓰임이 있는 종이를 만들기도 하고, 예술작품으로써의 종이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한지가 있듯, 일본에는 와시(和紙, 화지)가 있다. 일본의 각지에서 다양한 특성을 가진 와시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언젠가는 현지를 방문해 체험하고 싶어하던 참이었다. (시마네현의 세키슈한시, 기후현의 혼미노시, 사이타마현의 호소카와시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첩첩산중 안에 있는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려 리무진 버스로, 전철로, 또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로 숙소까지 바로 가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카미코야의 요헤이씨가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데릴러 와주셨다(카미코야는 네덜란드 출신의 로길 씨, 그리고 그의 가족 치카코 씨와 요헤이 씨가 함께 꾸려가고 있다). 정류장에 서서 기다리니 요헤이 씨가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정말 깊은 산 속,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숲 한 가운데에 그들의 스튜디오가 있었다.
장장 도쿄에서부터 6시간 정도를 들여서 스튜디오에 간신히 도착했다. 지나치게 긴 시간을 대중교통 안에 갇혀있었던 탓에 두통이 찾아왔고 첫날은 영락없이 숙소에서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워크샵을 위한 연수여행이었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고 내일 워크샵을 위해 푹 자고 아프지 않도록 컨디션 조절에 힘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잤다.
이튿날, 로길 씨는 작업을 시작하기 앞서 집 주변을 돌며 작업장을 소개해 주셨다.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기르는 밭과 합숙할 수 있는 큰집, 클라이언트가 찾아왔을 때 샘플을 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무실, 실제로 제작이 이루어지는 아틀리에까지. 사무실에는 다양한 종이 샘플이 놓여 있었고, 마치 눈이 내린 마을처럼, 종이로 둘러싸인 사무실은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이곳에 수십년 째 살고 있는 카미코야 일동은 동네의 어르신들께 매해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다. 그분들께 비어있는 땅을 빌려 쓰고, 또 그 대신 어르신들은 이들의 재배를 돕는다고. 서로가 가진 것을 동등하게 주고 받는 이들의 관계가 무척이나 좋아보였다.
나는 종이를 만들 때, 채집하여 이미 건조까지 마무리된 닥나무를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내가 나무를 기를 땅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기른 재료로 작업을 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카미코야에서 처음으로 '아 내가 직접 기른다면'하고 상상해 보았다.
견학을 마치고 아틀리에에 돌아와 로길 씨로부터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와시에 대해 전수(?) 받았다. 고작 하루 뿐이라 많은 것을 익힐 수는 없었지만 나의 상태에 딱 적절한 만큼의 배움이었다. 건조과정이 필요한 탓에 추후에 따로 배송해주시기로 했고, 서둘러 나는 버스에 올라타야했다. 짧지만 정든 카미코야에서의 시간은 지금도 이따금씩 떠올린다. 창밖으로 펼쳐진 초록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던 그곳에서의 시간을.
아마도 이때부터일 것이다.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방학을 맞아 서울에 갈 때마다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게 된 것도. 이곳에 와서 살면서, 점점 내가 만들어내지도 않은 것에 기대 너무 편리하게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회의감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텍스타일이라는 분야에 발을 담그면 담글수록 의식할 수 밖에 없는 당연한 문제의식인지도 모른다. 텍스타일은 자연 안에서 일어난다. 재료를 모두 땅에서 직접 길러낼 수 있어, 내 눈 밖에서 생겨나는 것이 하나 없다. 텍스타일은 일상과 가장 밀접한 예술임과 동시에 강렬한 노동이다.
학기가 시작되고 바쁜 일정을 보내던 내게, 어느날 소포 하나가 날아왔다. 로길 씨로부터였다. 내가 만든 종이를 잘 포장하여 보내주셨다. 이후 이메일에는 "건조 후 처리하던 중에 내 종이가 훼손되어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종이로 채워넣었다며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적혀있었다. 과정이 어떠했건 장인의 종이를 공짜로 얻은 것 같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코우치현에 다녀온 후 생긴 '시골에서의 삶'에 대한 망상은, 학교를 다니고 일상을 살 수록 되려 현실적인 상상이 되어갔다. 어느 동네가 좋을지, 어떤 것들이 필요할지, 가게 된다면 언제가 좋을지 ... 점점 이루고싶은 꿈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준비가 되면 나를 하염없이 자그맣게 만들어주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 불필요한 무모함이라는 주변의 걱정과는 달리, 편리하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지혜와 수고가 필요한지 알기에 생각만으로도 오히려 신이 난다. - 집다운 집 중에서
무엇하나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는 정직한 작업이 하고 싶다는 그런 꿈
그러기 위해 더욱 솔직하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꾸리고 싶어졌다. 어디 하나 '부러'하는 것이 없이 자연스러운 그런 곳. 그래서 종이를 만들 때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이 바로 흙으로 스며들 수 있는 곳, 종이를 만들기 위해 사용할 원료인 닥나무를 직접 기를 수 있는 땅이 있는 곳, 아침에 일어나 또 다른 방문을 열면 곧바로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작업실이 있는 곳. 그런 곳으로 옮겨가 살고싶다. 그곳이 어디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나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해주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때가 오면 나는 겸허하게 나만큼의 크기로 자연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
“음식을 먹으려 할 때마다 사람이 들어오는 바람에 번번이 도망하느라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만 곯게 된 시골쥐는 서울쥐에게 “맛있는 것이 아무리 많다 해도 마음 편히 먹을 수 없는 여기보다, 초라하더라도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시골이 더 낫다.”고 말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 시골쥐 서울쥐 중에서
시골쥐 서울쥐를 떠올리며, 작지만 원대한 시골이주 프로젝의 이름은 <시골쥐 프로젝트>라고 지었다. 나 또한 작지만 편하게 나로 살 수 있는 곳을 꿈꾸는 한마리의 시골쥐니까. 아마도 조금씩 이 <시골쥐 프로젝트> 시리즈는 긴 시간에 걸쳐 연재가 되겠지. '예비' 시골쥐의 현실적 망상은 오늘도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