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

북치는 소년_김종삼

by ean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김종삼, 북치는 소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어긋나고 싶을 때가 있다.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삶이 신산하다.


마음 안의 말을 뱉어내는 것조차 버거울 때, 최소한의 글자들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

글자에, 그리고 글자와 글자,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꼼꼼히 마음들을 심는다.


심한 비약적 압축이 물음표를 만든다.

고개를 갸웃거릴 지도 모른다.

숨겨지고 생략된 비유적 대상은 무엇인가?

크리스마스 캐럴의 제목이기도, 시의 제목이기도 한 ‘북치는 소년’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 대상을 찾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무의미한 짓이다.


다만 여백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그 울림에 동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이란 때로는 ‘공허함’에서 진정한 ‘채움’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얀 백지가 우리에게 더 많은 말들을 전달하고는 한다.

더 많은 감동을 주고는 한다.


의미 없이 빚은 졸작에서 순간의 찬란한 미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것은 글일 수도 있고, 그림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건축물일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무심결에 누군가의 손끝이 스친 ‘어떤 무엇이든’이다.

끝없이 어두운 삶에서 꿈을 꾸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현실 속 동화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꿈, 상상이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 때, 삶이 좀 더 환해질 수 있다.


굳이 의미를 파헤치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뜻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진실한 순간들이 있다.


아름다운 것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언제나 어둠 속에서 내용 없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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