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빛 담담한...

행복_유치환

by ean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행복



빛이 들지 않은,

무채색의 벽을 두른,

얇은 옷 사이로 냉기가 스미는,

조용하고도,

낯선,

복도에 서 있었다.


숨어버린 너를 찾아야지.

어쩌면 찾을 수 없을 지도 몰라.


그러나,

용기를 내야지.

또각또각.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준다.




끝이다, 복도 끝.

가슴 안에 밀려드는 공허함이 눈에 번진다.

찾지 못했어.

맥이 풀린다.

온몸이 시리다.


힘을 잃고,

용기를 잃고,

허우적대는 발걸음을 되돌리는 순간,

내가 걸어온 그 자리에 희미하게 네가 서 있다.


싸늘한 네게 겨우 다가간다.

마음 안의 무수한 말들은 모두 아낀 채,

준비해 온 음악을 네 귀에 전한다.


너는 음악을 듣고,

나는 침묵으로 기다린다.


무표정한 네 표정에 언뜻 비치는 흐느낌이 슬프다.

애써 외면한다.

노래가 끝나고,

조용히 뒤돌아 선다.


안녕.

이란 말은 삼키고,

안녕한다.




쌀쌀한 바람과 함께 10월이 오면, 줄곧 생각나는 그림과 음악이 있다.

어쩐 지 그것들은 차갑고 아프지만, 끝없이 이어진다.


지금

여기

우리

세 단어면 돼요.


어느 노랫말 가사처럼,

영원처럼 언제나 '지금, 여기'인 순간들이 있다.


바람 선선한,

하늘 청명한,

갈빛 담담한,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가을이 그러하듯이.

너와 나, 우리의 이야기가 그러하듯이.


순간,

순간,

수 많은 순간들이 영원으로 남아 과거의 어느 텅 빈 자리에 나를 덩그러니 내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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