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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rukinasy May 16. 2017

좋은 맥주는 해외에 있을 때 열심히 마셔야 한다

러시아 _ 14 : 이르쿠츠크, Kwakinn

20170205, 맥주 한 잔, 크왁인, 벨지안 비어 카페




저녁을 먹기는 했지만 충분한 양을 시킨 것도 아니었고, 그대로 돌아가기도 아쉬웠는 데다, 늦은 시각이기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보기도 힘드니, 부모님도 나도 그냥 술이나 한 잔 더 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다음날의 일정은 그냥 리스트뱐카(리스트비안카)로 갈 뿐이었고, 거기서 할 수 있는 것도 크게 다양하지 않았던 터라 이미 조사가 끝났기 때문에 맥주나 더 마시고 쉬고자 하였다.


하지만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이 있을는지 걱정스러웠는데, 맥주를 돈도 별로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좋은 것만 마시다 보니, 입맛이 하늘을 뚫어버릴 정도로 올라가버려서 웬만한 곳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몰비어 같은 곳에 절대로 안 갈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어차피 가는 건데 괜찮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원래는 검색할 때 레이트비어(RateBeer)나 비어어드보케이트(BeerAdvocate)를 참조하나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기에 혹시나 싶어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로 검색해보니 근처에 벨기에 맥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크왁인(Kwakinn)이 나왔다. 위치도 식사했던 곳 바로 앞이라 엄청 가까웠기에 바로 가기로 했다.


크왁인(Kwakinn) 입구.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


※Kwakinn 관련된 링크
홈페이지(러시아어, 영어[우측 상단 en]), 구글맵 정보, 오픈스트리트맵(좌표)
맥주 메뉴(러시아어, PDF, 속도 느림, 링크가 바뀔 수 있음)
이르쿠츠크의 Kwakinn(크왁인)은 프랜차이즈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중심입니다.


지하로 내려오면 보이는 광경. 여기서 좀 더 가야 사람들을 볼 수 있다. ⓒ


육중한 문을 여니 생각보다 적막한 분위기에 놀랐는데, 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조금 걸으니 드디어 직원들과 바가 보였다. 인테리어는 다소 수수했지만, 백 바(Back bar)에 보이는 수많은 보틀들이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바 테이블과 맥주 디스펜서, 그리고 그 너머 보이는 백 바까지. ⓒ


직원은 웨이터 한 명과 바맨(Barman) 한 명이었는데, 전반적으로 편안한 복장과 분위기로 있었지만 두 분 모두 친절했다. 바맨과는 대화를 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웨이터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메뉴판은 음식 메뉴와 주류 메뉴로 나뉘어 있었는데, 음식 메뉴는 영어로 메뉴명과 간단한 설명이 되어 있었고 러시아 메뉴판과 동일해 보였다. 주류 메뉴는 설명이 러시아어로만 되어 있었지만, 맥주의 사진과 함께 종류와 이름이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으므로 기본적인 맥주 상식만 있으면 고르기 쉬울 것 같다.


수십 가지의 탭과 그 이상의 보틀 목록을 보고 입이 떡하니 벌어졌는데, 그 정도로 다양하게 갖추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벨기에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그렇게 많은 맥주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대단했다. 벨기에에서도 그 정도로 갖추고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만약 내가 이르쿠츠크에 살았다면 무조건 단골이 되었을 것 같을 정도였다.


책자로 된 주류 메뉴판. ⓒ




그리고 이런 것을 볼 때마다 한국의 사정과 비교되어 상당히 슬퍼지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곳을 만나는 것이 참 힘들며, 솔직히 앞으로도 수년간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잘해봐야 대도시에서 매니아들 상대로 장사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높은 주세로 인한 높은 가격과 대중들의 인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둘 다 엄청나게 바뀌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주세는 입법자들이 세수를 위해 줄일 생각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주폭 등을 우려한 국민들의 오해로 내려가기 힘들 것이다. 주폭을 막기 위해 주세를 올리자는 주장이 종종 보이는데, 실제로 온갖 주폭의 행사는 녹색병의 희석식 소주나 대기업의 라거를 수단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기본 제조원가 자체가 낮기 때문에 주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오히려 고급 주류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들은 주폭의 주된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조원가가 높아서 세율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격이 높아지다 보니 진입장벽 또한 매우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술은 향과 맛을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닌,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류들이 발달하지 못한다. 물론 취기를 목적으로 마시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오직 그 자체만이 목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한국의 술 문화가 희석식 소주와 라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술의 맛과 향에 대한 인식이 낮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거기서 벗어나면 정말 다양한 양상을 즐길 수 있는데, 이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굳이 수입주류에서 답을 찾지 않더라도, 가장 토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막걸리만 보더라도, 잘 만든 막걸리는 정말 풍부하면서도 좋은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참조). 다만 대중들이 지나치게 지배적인 주류들만 맛보다 보니, 이런 술의 화려함은 알지 못한 채 취하는 것에만 빠져들어 진정한 빛을 못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울 뿐이다.


이러한 한국의 사정들이 언제 나아질지 알 수 없을뿐더러 정말 까마득하다. 내가 처음 다양한 맥주에 관심을 가졌을 때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맥주뿐만이 아니라 주류 전반적으로 볼 때는 부분적인 대중화로 나아가기에도 아직은 정말 부족해 보인다.




참조 삼아 올리는 노래방 책 두께의 맥주 메뉴판 @캄브리누스. 안의 반 이상은 빽빽한 표로 되어 있다. ⓒ


맥주의 종류가 많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넓다는 점에서는 좋긴 하지만, 그 선택을 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 예전 브뤼헤(브뤼주, Brugge)의 캄브리누스(Cambrinus)에서 노래방 책 두께의 주류 메뉴를 받았을 때 전부 훑는 데만 10분 걸린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득하다. 다행히도 여기는 얇지만 알차게 구성되어 있어서 고르기 편했다. 벨지안 펍을 표방하는 관계로 맥주들이 벨기에산으로 치중되어 있긴 하지만, 그 종류가 다양해서 취향에 맞는 맥주를 찾기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맥주를 갖추고 있는 곳에서는 기존에 마시던 것과는 다른 것을 마셔보기를 추천하는데, 어차피 다른 데서 마실 수 있는 것을 여기에 와서까지 마시는 건 소중한 기회를 날리는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라거 종류는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진짜 괜찮은 라거가 아니라면 제외하고, 한국에서는 비싸서 마시기 힘든 벨지안 에일과 트라피스트를 추천하며, 도전 욕구가 강하다면 시큼한 맥주나 과일이 많이 들어간 부류도 추천한다. 다만 그런 맥주들은 라거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들이켜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고, 와인과 라거의 중간 정도라고 생각하며 마시는 편이 낫다.


사실 이런 데서는 직원의 추천을 받는 것이 좋다. 언어도 잘 안 통하는 직원에게 추천받기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추천을 받으면 실패할 가능성은 많이 낮아진다. 다만 전체 메뉴 중에서 추천해달라고 하면 그들도 선택해주기 상당히 난감할 뿐만 아니라 무난한 것 위주로만 추천을 받게 된다. 대신 범위를 살짝 제한하여 묻는다면 그들도 훨씬 수월하게 답을 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괜찮은 맥주를 추천받을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혹시 초보자라면 Blond가 무난할 것이고, Amber와 Dark는 각각이 지니는 특유의 향 때문에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오히려 맞다면 그 구수한 맛에 반하게 될 것이다. White는 일반적으로 다소 밋밋하며 Lager를 마실 거면 차라리 다른 곳을 가는 게 낫다. 다만 여기서 Special Sorts로 구분되는 Lambic 계열은 시큼한 맥주가 많으므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처음 접할 때는 큰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계속 마시다 보면 오히려 그 매력에 헤어 나오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가서 엄청나게 괴로워질 수 있으므로 큰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직원의 추천을 받기보다는 나의 주도로 메뉴를 정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귀찮아서 탭 중에서 적당히 선택을 했는데, 진한 Dubbel 하나와 람빅(Lambic) 두 종을 주문했다. 어떻게 보면 매니악하다고도 볼 수 있는 선택인데, 이는 내가 이전 한국에서부터 부모님께 이런저런 맥주를 소개함으로써 진입장벽을 많이 낮추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선택은 다소 무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식당에서 완전히 배부르게 먹지는 않았기에 안주 삼아 음식을 주문하려고 했는데, 고민하고 있자 웨이터가 자기네들은 소세지가 정말 맛있다고 하였기에 주저하지 않고 주문하였다. 일부러 나서서 추천할 만큼 자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봐도 침이 주르륵 흐르는 맥주들. ⓒ


맥주가 먼저 서빙되었는데, 살짝 차갑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잔도 최대한 전용잔에 맞추어 서빙하는 등, 사소한 점에서도 신경을 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이스팅 노트를 따로 적지 않아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람빅 둘 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마실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찮다고 탭에서만 선택을 했는데, 바틀 중에서 선택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 Dubbel이 오히려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떠오르는 바가 거의 없다.


약간 투박한 느낌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던 소세지. ⓒ


이어서 나온 소세지도 훌륭했다. 돼지고기와 소고기가 섞인 소세지를 주문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육향이 제대로 나면서도 비릿하지 않았으며, 고기의 질감이 살아있는 편이었다. 완전히 으깨어져 부드러운 질감의 소세지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안 맞을 수 있겠으나, 나는 이쪽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토마토소스가 곁들여져 나왔는데, 색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당히 어울렸다. 오히려 케첩이나 머스터드와 같은 맛이 강한 컨디먼트들이 아니라서 좋았는데, 그런 것이 같이 나왔다면 훌륭한 소세지의 풍미를 많이 헤쳤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얘기하다 보니 생각보다 금방 다 먹고 마시게 되었다. 그래서 2차적으로 주문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의 맥주도 괜찮았고 소세지도 마음에 들었기에 좀 더 벨기에다운 경험을 부모님께 시켜드리고자 하였다. 벨기에에서는 홍합요리가 꽤 대중적이고 맥주와도 자주 먹기 때문에 심플한 형태의 벨기에식 홍합찜을 주문했는데, 이미 먹은 것들이 많았으므로 작은 사이즈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맥주도 좀 더 보편적인(?) 쪽으로 주문했는데, 델리리움 트레멘스(Delirium Tremens)와 오르발(Orval)과 크릭(Bourgogne des flandres) 한 종을 선택했다.


크릭은 좀 그저 그랬다. ⓒ


트레멘스는 탭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오르발은 병이었다. 개인적으로 트레멘스와 오르발은 여러 차례 먹어봤기 때문에 아주 큰 감흥은 없었지만, 역시 엄청 훌륭해서 상당히 기뻤다. 다만 크릭은 좀 기대를 했는데, 생각보다 밋밋해서 그저 그랬다. 흔히 마구간 냄새나 젖은 가죽 냄새라고 하는 묵은 냄새가 지배적인 점은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 정도가 지나쳤으며, 약간 물과 같은 느낌이었고 과실의 향도 미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충분히 본토 느낌이 나던 홍합찜. ⓒ


이어서 홍함찝이 나왔는데, 같이 나온 감자튀김이 두꺼우면서도 잘 튀겨서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얇은 감자튀김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벨지안 스타일이라면 당연히 두꺼워야 하고, 마요네즈와 같은 크리미한 소스가 어울린다. 홍합찜에서도 상당히 좋은 냄새가 났는데, Aromatic Vegetable과 화이트 와인이 섬세하면서도 향긋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향을 더해주었다. 홍합도 당연히 맛있지만, 바닥에 있는 자박한 국물은 칼칼한 홍합탕 국물과는 또 다르게 환상적인 맛을 선사한다. 만드는 방법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지만, 그리고 엄청 좋아하지만, 이상하게 잘 안 하게 된다.


계산하면서 나오는 길에, 백 바에 여러 나라들의 지폐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3번째 사진 참조) 진기한 광경이기는 하지만, 막상 내 돈으로 저렇게 붙이라고 한다면 아까워서 못 한다. 한국 만원권도 한 장 붙어 있는 것을 보니 한국인도 다녀가긴 한 모양이다. 구경을 하고 발길을 돌리는데, 아버지께서 천원권을 한 장 직원에게 증정하여 만원권 옆에 붙이도록 하였다. 천원권 정도면 기념으로 괜찮다는 느낌이다. 이제 오천원권과 오만원권만 있으면 콜렉션이 완성되니까 누군가 가서 완성해주길 바란다.(?)




러시아 한복판에서 웬 벨지안 펍이냐고 의아해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물론 러시아나 시베리아 현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들도 상당히 좋지만, 내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벨지안 펍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가격도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다만 당연히 유럽 대륙, 특히 벨기에에서 마시는 것보다 비싸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다음에 이르쿠츠크를 방문했을 때,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라면 다시 올 의향이 충분히 있다. 물론 음식 메뉴도 상당하기에 식사를 하러 와도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식사는 다른 괜찮아 보이는 대안이 많으므로 일단 미루고 싶다. 혹시 이르쿠츠크에 왔는데 맥주에 대한 관심이 많거나 좋아할 경우 여기를 꼭 들려볼 것을 추천한다. 다만 맥주에 대한 과거로부터의 고정관념이 강하게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기피해야 할 대상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러시아의 커피들은 뭔가 전반적으로 다 독한 느낌이다. ⓒ


돌아가는 길에 Coffeeshop Company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나눠 마시며 돌아갔는데, 진한 편이었지만 괜찮았다. 그리고 다음 날 리스트뱐카(리스트비얀카)로 향했다.



설명에 ⓒ가 붙어있는 사진과 타이틀만 직접 찍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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