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의 마법
10시 8분. 버스에서 내렸다. 너무 일찍 도착했다. 바로 들어가기엔 하얀 눈이 아깝다. 벌써 6개월째 다니는 익숙한 길이지만 철저한 J형 인간인 난 늘 같은 길로만 걸어 다녔다. 오늘은 모처럼 눈이 내렸으니 다른 길로 가볼까? 횡단보도를 건너 빵집을 지나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익숙한 길을 제치고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젊은이들의 거리라더니 낯선 가게들과 음식점, 카페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커피라도 한 잔 사서 가고 싶지만 카페 중에 문 연 곳이 없다. 다른 가게들도 마찬가지다. 새벽까지 영업을 했나 보군.
시골에서 갓 상경한 노인네처럼 두리번거리며 골목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렸다. 평소 같으면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을 텐데 오늘은 마냥 여유를 부려 본다. 하얀 눈이 마법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난 길을 잃어버렸다. 정말 거짓말처럼 길을 잃어버렸다.
8년 전,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1인 기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 당시 남편은 정부 중앙부처 공무원이었다. 처음부터 공무원은 아니었다. 단지 다니던 직장이 IMF를 거치며 통합에 통합을 거듭한 끝에 어느새 중앙부처가 되어 버렸다. 주변에서는 철밥통 직장인이 된 그를 부러워했다. 얼떨결에 공무원이 되었지만 그 세계의 텃세와 이상한 상사, 새벽별 보며 출퇴근하는 일상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 사정을 낱낱이 알고는 있었지만 난 사직을 말렸다. 그의 절박함이 보였지만 고3, 중3의 자식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왜 그런지 알기에 비난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했다. 직원도, 사무실도 없었다. 시부모님께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려웠다. 그리고 불안했다. 끝이 보이지 않은 외딴길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10시 20분! 이마에서 식은땀이 난다.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일 텐데 설마 못 찾을까 싶었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10분 안에 이 골목을 벗어나 강의실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지금까지 마법을 부리는 것 같던 하얀 눈은 거추장스러운 눈으로 변했고, 한적한 골목의 문 닫힌 가게들은 게으른 가게들로 변했다. 무심결에 신발장 위에 얹어 놓고 온 휴대폰이 간절해졌다. 간간이 지나는 사람이 보였지만 코앞에 목적지를 두고 길을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온 남편에게 사업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남한테 싫은 소리, 아쉬운 소리 한 번 못해 본 사람이 영업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인맥으로 소소한 일거리가 들어왔지만 그것뿐이었다. 통장의 잔고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흐~읍, 후우~. 호흡을 길게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5층 건물이 멀리 보였다. 하지만 이 골목의 끝을 예측할 수가 없다. 할 수 없지,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어림짐작으로 방향을 잡고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어, 여긴 지난주에 커피 마셨던 곳이네?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디엔가 있겠군. 기억을 더듬어 지난주에 이곳까지 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마침내 미로 같기만 하던 골목을 빠져나왔다. 제 시간 안에!
나는 1주일에 3일만 하던 수업 시간을 5일로 늘려 아이들을 받았다. 나는 밤이면 파김치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남편은 조바심을 내비치며 본인의 선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길고 깜깜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 거라고, 곧 지나갈 거라고 위로했지만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1년 뒤, 남편은 폐업 신고를 하고 짧다면 짧은 외도를 끝냈다. 그리고 새로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나는 지금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하루빨리 익숙해지길 기대하면서. 그리고 이 길이 마지막 길이길 기대하면서.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앉았다. 다음 주엔 새로운 자리에 앉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