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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Sep 19. 2023

소소한 일상 1

엄마와 딸


  오랜만에 삼청동을 향했다. 광화문역에서 내려 슬슬 걸었다. 완연한 봄볕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덕성여고 앞을 지나는데 작은 좌판이 눈에 띄었다. 많지는 않지만 액세서리가 종류별로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바라봤다. 좌판 주인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자기 작품이라며 이것저것 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엔 반지만 들어왔고 이내 연한 녹두빛의 반지를 골라 흥정을 했다. 주인은 나와 잘 어울려서 깎아 준다고 했다.

 ‘장사를 잘하시네!’

 골목길로 접어들며 손에 낀 반지를 봤다. 반지보다 내 손에 눈이 더 갔다.

 “이 곱고 하얀 손에 평생 물 안 묻히고 살아야 할 텐데…”

 30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남들보다 유독 손가락이 길고 하얘서 그랬는지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주문을 외듯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설거지며 손빨래 등 곧잘 물일을 시켰더랬다. 그런데 정작 대학생이 되자 일절 못하게 하셨다.

 “어차피 평생 해야 할 일, 미리 할 필요 없다. 여자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손이 보여 주는 거야. 물에 손 넣지 마라.”

 난 철딱서니 없이 곧이곧대로 그렇게 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물에 손 담그는 집안일엔 많이 게으르다. 정 해야 할 때는 한여름에도 고무장갑을 낀 채 일하고 걸레 빠는 것도 싫어해서 쌓아 놨다가 한꺼번에 빨곤 한다. 당연히 손빨래도 안 한다. 가끔 집안일이 하기 싫을 때면 남편에게 엄마 얘기를 했다. 남편은 그렇게는 못해 주지만 쓰레기는 손에 안 묻히게 해 주겠다며 자처해서 쓰레기 담당을 했다. 그래서 내 손은 언제나 하얗고 고울 줄 알았다. 하지만 세월에 장사 없다는 옛말처럼 내 손도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하고 있다.


 물끄러미 반지 낀 손을 보니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난다. 하얀 손으로 풍금을 치던, 칭얼대는 나에게 크레파스로 산타할아버지를 그려 주던 엄마가 떠오른다. 그 엄마의 손을, 마디가 생기고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손으로 한 번만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즈음, 딸아이가 매니큐어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매니큐어를 바를 모양이다. 진한 남색 매니큐어가 고약한 냄새를 뿜어 대며 아이의 하얗고 긴 손가락 위에 덧입혀졌다. 어느덧 다 말랐는지  아이가 파스타를 해주겠다며 일어섰다.

 “아냐, 하지 마. 엄마가 해줄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매니큐어 바른 거 지워지면 어떡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속으로 말했다.

  ‘우리 딸 아까워서 그러지!‘

 나는 엄마 손 대신 딸아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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