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과 편견
“아무래도 이건 너무 작아. 여보, 집주인에게 냉장고가 너무 작다고 말해봐. 이 대로면 마트를 매일 가야 할 것 같아….”
그랬다. 가까스로 렌트한 집에 있는 냉장고는 5살 콩알이 키보다 작은 1인용 냉장고였다. 냉장고에 별 거 넣지 않아도 꽉 차고 냉동실에는 얼음틀과 냉동식품 한두 봉지만 겨우 들어갔다. 처음에 집을 봤을 때도 영 불안했지만 1달을 민박집에 돈을 넣고 있던 처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냉장고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버스비도 아쉬운 터라 1주일치 장을 한꺼번에 보고 싶었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는 남편이었지만 본인이 봐도 안 되겠다 싶었나 보다. 남편은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 설명했다. 여긴 렌트한 집에 문제가 있으면 주인에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부동산에게 얘기하는 구조였다(계약서 쓰고 중개비만 받으면 끝인 우리나라와는 딴판이다. 나중에 듣기로는 주인에게 관리 수수료를 받는다고 했다). 얼마 뒤, 주인이 우리 사정을 이해하고 냉장고를 주문했으니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주문했다고 했으니 곧 오겠지! 하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냉장고는 오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몰랐다. 영국, 아니 유럽이라는 나라의 일 처리 속도를! 한창 잘 먹는 아이들을 먹이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장을 봐야 했는데 어떨 때는 먹어대는 아이들을 보며 그만 먹었으면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내일 배달이 온다는 연락이 왔다. 집이 비어 있을 때 오면 어떻게 하나, 혼자 있을 때 오면 어떻게 하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기다렸다. 애들이 학교 끝나고 와서 간식을 다 먹을 때쯤 벨이 울렸다. 난 반사적으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
문 앞엔 냉장고 상자와 함께 덩치 큰 흑인 2명이 서 있었다. 냉장고 주문한 거 맞지? 하며. 어쩐지 싱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무서운 생각이 들어 아이들을 불렀다. 왠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할 것만 같았다. 잔뜩 긴장한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아이들도 내 뒤에 숨어 고개만 내밀었다. 난 분명 인종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런 상황에 맞닥뜨리자 본심이 드러났다. 내 머릿속의 흑인은 덴젤 워싱턴 빼고 다 위험한 존재였고 악당이었던 거다.
배달 온 흑인들은 현관문 바깥에 냉장고 상자를 세워 둔 채 배달 끝났으니 가겠다고 했다.
‘응? 여기에 이렇게 놓고 간다고? 장난하나?’
200리터도 안 되는 냉장고였지만 내 키만 한 걸 나 혼자 주방으로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난 용기를 내서 냉장고를 안으로 넣어 달라고 했고, 그들은 흔쾌히 안으로 옮겨 줬다. 그리고는 “됐지?” 하더니 가 버리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고맙다고 말하고 문을 닫았다. 주방 문 앞에는 박스에 들어 있는 냉장고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갑자기 한국이 그리워졌다. 말도 잘 통하고, 서비스도 좋은, 그러나 살고 있을 때는 결코 몰랐던 내 나라가 그리웠다.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박스를 뜯고 냉장고 자리로 끙끙대며 옮겼다. 정리를 마치고 차 한 잔 마시며 배달온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데 남편이 무심코 한마디 던졌다.
”당신,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있었나 보다! “
그랬다. 차별까지는 아니었지만 편견을 갖고 있었던 건 맞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사는 동안 내 편견을 버리겠노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