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서 생긴 일
한국인은커녕 아시아인도 보기 힘들다는 이 동네, 런던 외곽에 집을 구했다. 단지 애들 학교가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는 얘기만으로 다른 조건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남편 공부를 핑계로 애들 영어 교육을 단단히 시키겠노라 다짐했던 터였다. 지금이야 좋은 영어 교재나 학원, 다양한 온라인 강의들이 있지만 20년 전엔 별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3주나 한인 민박에 머물면서 급하게 구한 집은 플랏(flat)이었다. 족히 50년은 넘은 집이라고 부동산에서 들었는데 꽤 큰 앞마당에 늘어서 있는 나무만 봐도 오래된 집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예전엔 큰 저택이었는데 주인이 몇 번 바뀌면서 5 가구가 살 수 있도록 개조한 집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1층에 2 가구,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 2 가구, 한 층 더 올라가면 다락방에 1 가구가 살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2층에 살았다. 아이들은 잔디 마당이 있다며 좋아했다.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잔디 마당은 엄청난 혜택이었다.
배로 붙인 이삿짐은 2달 가까이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타고 온 비행기로 간단한 살림살이를 가져왔더랬다. 그래봐야 압력솥, 수저 4벌, 1회용 그릇과 노트북, 이부자리, 간단한 옷가지가 다였다. 기본적인 가구가 포함된 집이라고는 하나 한국의 아파트에 비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작은 방 2개에 거실 하나, 4 식구가 들어가면 꼼짝달싹 할 수 없는 크기의 부엌, 그리고 욕조가 달린 화장실이 있었다. 50년이 넘은 집답게 거실과 방을 걸어 다니면 카펫이 깔려 있는데도 삐걱거리는 나무 마루 소리가 크게 들려서 갑자기 바닥이 꺼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의 그런 걱정 따위를 알 리 없는 아이들은 그 소리가 재미있다며 오히려 뛰어다녀서 많이 혼나기도 했다.
영국의 학기는 9월에 시작된다. 우리는 7월 말에 도착, 8월 중순경 집을 구했으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엔 시간이 떴다. 한참 힘이 넘치는 8살짜리 아들(감자)과 세상에 눈 뜨기 시작한 5살짜리 딸(콩알이)을 데리고 낯선 땅에서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남편은 날마다 어학원에 갔고 내 영어 실력은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나 혼자 애들을 데리고 집 밖에 나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잔디가 깔린 앞마당은 주차장을 겸했는데 우린 거기에 차가 있는지를 살피며 다른 집에 사는 사람이 나갔는지를 확인했다. 어느 날 감자가 한껏 달뜬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엄마, 집에 아무도 없어. 우리, 마당에서 놀면 안 돼?”
과연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잘됐다 싶었다. 안 그래도 심심해서 주리를 트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그래, 그 대신 콩알이 대문 밖으로 나가게 하면 안 돼!”
감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콩알이를 데리고 나갔다. 거실 창으로 내다보니 둘이 뭘 하는지 잔디밭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낄낄거리고 있었다. 모처럼 맘 편하게 커피 한 잔 마셔도 될 것 같았다. 커피 잔을 들 때였다.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창밖을 내다봤다. 어떤 흑인 여자가 우리 애들에게 손가락질하며 고래고래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시 보니 1층에 사는 여자였다. 아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콩알이는 오빠 뒤에 숨어 있었다. 난 총알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여자는 날 보자마자 속사포같이 영어를 쏟아댔다. 하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난 애들을 막아 서고 그 여자를 노려 봤다.
“What’s wrong?”
난 최선을 다해 무서운 표정으로 외쳤다. 그 여자는 잠깐 노려 보는 듯하더니 “Be quiet!” 한마디를 내뱉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순간 멍했다.
‘조용히 하라고? 별로 시끄럽지도 않았는데? 내 집 마당인데? ’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놀란 가슴에 나를 보니 설움이 북받친 듯했다. 나도 서러웠다. 하지만 거기서 큰소리로 애들과 같이 울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눈물을 닦아 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아이스크림을 꺼내 주었다.
“여기선 마당에서 못 놀겠다. 조용히 하래!”
아이들은 실망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 여자의 위세에 질렸는지 알았다고 했다.
“근데 엄마, 아무도 없을 땐 놀아도 되는 거지, 그치?“
콩알이가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안된다고 하기엔 눈빛이 너무 간절했다.
“그래, 진짜진짜 아무도 없을 때만!”
하지만 새가슴 엄마 덕에 집에 아무도 없어도 아이들은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한 번도 마당에서 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