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의 휴가(14)

‘사랑의 불시착’?

by 애니

오늘은 루체른으로 가는 날이다. 루체른은 벌써 3번째라 크게 흥미롭지는 않지만 추억 여행 삼아 가기로 했다. 후덜덜한 가격의 스위스 패스를 탈탈 털어 쓰기로 해서 브리엔츠까지 유람선을 탔다. 어느 순간부터 물을 무서워해서 배를 탄 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도 안 나지만 이번엔 큰맘 먹고 탔다. 속으로 은근 겁이 났지만 유람선이 출발하자마자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호숫가는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냥 눌러앉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같은 배경에 콩알이와 정신없이 셀카를 찍으며 연신 감탄할 즈음 어느 선착장에 들렀다. 다른 곳과 달리 유달리 사람들이 많이 내렸고 선착장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무심코 지나쳐 버린 그곳은 이젤발트라는 곳이며,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 촬영장이었다는 사실을 루체른에 도착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드라마 제목이나 출연 배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기에 몰랐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지만 K드라마의 위력이 느껴졌다.


브리엔츠에서 기차로 갈아탔다. 이젠 기차를 하도 타서인지 굳이 파노라마 기차를 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기차도 창문이 커서 스위스의 풍경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루체른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카펠교 건너에 있었다. 카펠교를 다시 건너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숙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엄마, 여기 주인 언니 감각 짱이야!”

콩알이가 흥분할 만했다. 캠핑장 오두막에서 개미와 이틀간 동거한 우리에게 숙소는 최신 호텔처럼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하얀 실내에 밀레 식기 세척기, 정결한 식기와 주방, 아늑한 소파와 커다란 침대, 넉넉한 옷장, 네스프레소 커피머신까지 모든 게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린 산책 겸 장을 보기로 했다. 강가를 걸으며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구경했다. 예전엔 아이들을 챙기느라 보지 못했는지 거리거리가 새롭게만 보였다. Coop에서 간단한 저녁거리와 세탁세제를 샀다. 먹거리와 달리 세제 가격을 보니 스위스 물가가 확 느껴졌다. 강가에 있는 식당에서 외식하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저녁을 하는 동안 빨래를 하기로 했다. 세탁기는 1층과 3층에 각각 한 대씩 설치되어 있었다.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움직임이 없다. 이상하다. 세탁기 사용법이야 다 똑같을 텐데! 콩알이와 머리를 맞대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그때 지나가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잠자코 세탁기를 작동시켜 줬다. 벽에 붙어 있던 스위치를 누르자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콩알이도, 나도 처음 보는 시스템이었다. 고마워하는 우리에게 그 사람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관광객은 아닌 것 같은데! 무심해 보이는 도움이 더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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