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의 휴가(13)

낡은 기억 속 셜록 홈즈의 최후-라우터브루넨? 라이헨바흐?

by 애니

그린덴발트의 아찔함을 뒤로하고 기차를 탔다. 이대로 숙소로 가기엔 스위스패스가 아깝다. 난 살살 콩알이를 꼬드겨 한 군데를 더 가기로 했다. 바로 라우터브루넨이다.

인터라켄으로 돌아와 기차를 갈아탔다. KTX에 익숙했던 우린 이 작고 느린 기차의 매력에 빠졌다. 끝없이 펼쳐지는 창밖의 풍경과 여유로운 여행자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가치는 충분했다. 감격도 잠시, 라우터브루넨 역에 도착하자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알프스 자락은 틀림없이 아름다웠지만 역이 너무 작고 대중교통도 드물었다. 게다가 두 시 넘은 시각에 안쪽으로 멀리 들어가기는 무리인 듯싶었다(이럴 때는 남자가 부럽다. 아빠라면 이런 고민 없이 딸을 데리고 갔을 테니까!)

우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폭포가 많다고 했으니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으며 슬슬 구경하기로 했다. 무작정 다른 사람들이 걷는 쪽으로 따라 걸었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크고 작은 폭포들이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사이사이 소들이 어슬렁거리며 자유롭게 풀을 뜯는 모습도 봤다. 그런데 그 소들이 어찌나 크던지 짐짓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난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눈이 송아지 눈이라고 했던 사람인데도 말이다.

눈으로는 멋진 풍경을 따르며 입으로는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그러다 문득 셜록 홈즈가 떠올랐다, 그것도 셜록 홈즈의 최후가 말이다. 모리어티 교수와 스위스의 폭포 위에서 싸우다 떨어져 죽은 그 장면이! (지금도 그렇지만 홈즈의 광팬이었던 난 그때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폭포가 바로 여기라고 생각했다. 난 신나게 콩알이에게 홈즈가 어쩌고 하면서 여기가 그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뜻깊은(?) 장소에 왔다고 생각하니 더욱 신이 났다. 힘든 것도 모른 채 한참을 걸으며 폭포를 보고 돌아왔다. 인터라켄 서역 앞 MIGRO에서 저녁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들어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콩알이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씻고 오기로 했다. 캠핑장이지만 샤워 시설이 좋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게 머리에 샴푸로 거품을 잔뜩 내고 물을 트는데 이럴 수가! 찬 물만 나왔다. 깜짝 놀라 얼른 물을 잠갔다. 5월 말의 스위스 저녁은 추웠다. 분명 어제는 아주 따뜻한 물이 나왔는데! 옆 칸에서 물소리가 났다.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거기 따뜻한 물 나오니?”

“아니, 안 나와. 그냥 하고 있어! 여긴 가끔 그래.”

도대체 서양인들은 왜 이리 건강한 거야? 할 수 없이 차가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와서 콩알이에게 얘기했다.

“아까 내가 씻을 때는 따뜻한 물 나왔는데?”

하, 이것도 타이밍인가?


지금 이 글을 쓰며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홈즈의 최후가 배경이 된 곳은 라우터브루넨이 아니라 라이헨바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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