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두 번째 배신-그린델발트
스위스패스를 알뜰히 쓰기로 했다. 10일짜리를 끊었으니 하루도 빼먹을 수 없었다. 어제 캠핑장 오면서 변치 않은 인터라켄 시내는 충분히 봤으니 오늘은 그린델발트를 다녀오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유럽은 소도시가 더 볼 만하다는 거였다. 수도나 대도시의 박물관이나 성당은 처음에만 감흥이 있을 뿐이다.
한국의 속도전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아니, 창밖의 경치 때문에 속도가 문제가 안 된 걸까?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너무나도 황홀했다.
그린덴발트 역에서 나오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초록초록한 산봉우리에 넋을 잃었다. 하지만 우린 ‘빨리빨리‘의 민족 아니던가. 콩알이와 난 coop에서 점심용 샌드위치와 물을 샀다. 여기에 한국인이 많아서일까, 한류 때문일까? 마트에 김치는 물론 한국 라면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10여 년 전, 런던에 살 때 일주일마다 김치 담그던 일이 문득 억울하게 느껴졌다(유럽의 배추는 한국의 알배추만 한 데다가 절일 만한 큰 대야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조금씩 담갔다).
여행을 오니 공원이나 길가의 벤치에서 샌드위치 먹는 건 일도 아니다. 게다가 알프스를 보며 먹고 있으니 빵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마을을 구경하며 걷다가 케이블카 타는 곳을 만났다. 아직 바이킹도 뒤에서 탈 만큼 간이 크지만 케이블카나 대관람차라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느린 속도에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건 생각만 해도 공포다. 그걸 아는 콩알이가 케이블카 타자는 말을 않는다. 아마 사악한 요금도 한몫했을 거다.
“케이블카 타자!”
“정말? 엄마, 못 타잖아!”
“지금 안 타면 평생 후회할 거야.”
그렇게 우린 케이블카를 탔다. 중간중간 심호흡을 했지만 케이블카에서 흘러나오는 요들송이 조금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정작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오니 놀이터 같은 게 나오는데 한쪽 끝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뭘까? 우린 호기심에 가까이 갔다. ‘마운틴 코스터’라고 써 있었다. 눈썰매같이 생긴 게 수로처럼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산 밑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아이와 함께 타는 걸 보자니 즐거워 보였다.
“엄마, 이거 타자! 나, 유튜브에서 봤는데 여기에 있었네! 타 보고 싶었어.”
모처럼 해보자는 콩알이 말에, 그리고 만만해 보이기에 그러자고 했다. 신이 난 콩알이가 먼저 타고 내려갔다, 한 손으로 영상을 찍으며.
드디어 내 차례다. 자리에 앉으니 천천히 내려갔다. 살짝 실망감이 들었다. 겨우 이런 걸 비싼 돈 주고 타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커다란 착각이었다. 내려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데다가 경사도 심했고 커브도 장난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내가 밖으로 튕겨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어딘가. 알프스 산자락이 아닌가. 너무 무서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여유롭던 스위스 여행의 최대 위기를 여기서 겪을 줄이야! 알프스의 초록이 공포로 다가왔다. 앞서 가던 콩알이가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봤다. 쟤는 안 무서운가?
무작정 발치에 있던 긴 막대기를 잡아당겼다. 어라? 속도가 좀 주는 것 같다. 아, 브레이크였군. 만만히 보고 제대로 설명을 듣지 않은 대가였다.
간신히 출발점에 돌아오니 콩알이가 잔뜩 신이 나 있다.
“엄마엄마, 한 번만 더 탈래? 완전 재미있지?”
정말 어이가 없다. 놀이공원 가면 돈 주고 왜 무서운 걸 타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아이였다!
“안 무서웠어? 엄만 브레이크를 당겨도 무서워서 혼났는데?”
“그게 브레이크였어? 난 몰랐네, 너무너무 재밌던데?”
결국 콩알이만 한 번 더 탔다.
“엄마는 의외의 포인트에서 약하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콩알이가 깔깔거리며 놀렸다. 고요하고 평화롭게만 느껴지던 그린델발트의 배신이다. 그러고 보니 스위스의 두 번째 배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