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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Oct 24. 2023

어쩌다 영국 5

콩알이, 국제 미아가 되다!

 결혼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아이들이 커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대로 사회에서 격리될 것만 같았다. 외아들과 손주들에 대한 시부모님의 관심은 갈수록 켜져 갔고 나와 친정아버지와의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다. 이 불편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때마침 남편이 유학을 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회다 싶었다. 하지만 난 내색하지 않고 대단한 희생을 하는 것처럼 굴면서 그를 지지해 줬다. 시부모님은 늦은 나이에 큰돈 써 가며 공부하겠다는 아들을 못마땅해하셨다. 여차하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난 조근조근 말했다, 서울에서는 애들 영어 교육을…….   효과 만점이었다! 얼마 후 날아온 남편의 입학 허가서가 선녀의 날개옷처럼 보였다.


 휴식 같을 줄 알았던 유학 생활은 나를 더 깊고 깊은 외로움으로 밀어 넣었다. 동양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동네, 습하고 우중충한 날씨, 알아듣기 힘든 독특한 영어 발음, 어마어마한 물가(그 당시 환율은 1파운드에 거의 2,000원이었다!), 느려 터진 공공 서비스, 이방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은 날마다 나를 좀먹었다. 남편은 학위를 얻고, 아이들은 영어를 얻고, 그럼 나는? 어쭙잖은 가난한 외국 경험을 얻는다? 억울했다. 나는 너무 힘들었는데 남편은 공부밖에 몰랐다. 힘들다고 하소연이라도 하면 남편은 어김없이 유럽 여행을 들먹이며 나를 달랬지만 말뿐이었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남편은 간과했다.

 “이게 뭐야?”

 남편은 황당하다는 듯이 여행 스케줄과 계약서가 들어 있는 우편물을 손에 든 채 나를 쳐다봤다.

 “어, 드디어 왔네! 서유럽 5개 국 여행 패키지 예약했거든. 당신이 공부 때문에 바쁜 것 같아서 내가 대신했어. 잘했지? 조금 있으면 방학이잖아.”

  잘했다고도, 화를 내지도 못하는 남편의 표정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스탠스테드 공항에 도착했다. 칙칙한 히드로 공항과는 달리 제법 현대적이고 환하다.  사람들이 북적였지만 빨리 도착한 덕에 일찌감치 수속을 마치고 찬찬히 면세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브랜드의 상점들이 줄줄이 유혹했다. 쇼핑의 천국이라는 런던에 살면서도 엄청난 물가 때문에 감히 쇼핑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내겐 별천지였다. 곧 내 생일이라는 핑곗거리가 생각났다.

 ‘슬슬 쇼핑해 볼까?’

 하지만 아이들이 따라붙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8살, 5살짜리 아이들에겐 공항도 그저 놀이터였다.

 “감자야, 콩알이랑 아빠한테 가서 놀고 있어. 엄마, 이것만 보고 갈게.”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남편을 가리키려 말했다. 다행히 감자가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난 바로 돌아서서 다시 쇼핑 삼매경에 빠졌다. 빨간 가죽 밴드에 큼지막한 자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눈을 반짝이며 시계를 보여 달라고 하는데 옆 진열장에 매달려 있는 감자가 보였다.

 “왜 여기 있어? 콩알이는? “

 “몰라!”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콩알이는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났다. 신문에 코를 박고 있던 남편이 무심히 쳐다봤다.

 “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애 안 보고 뭐 했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직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 되는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것도 낯선 나라의 복잡한 공항 한복판에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미친년이지, 그깟 시계가 뭐라고!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애타게 엄마, 아빠를 찾고 있을까? 나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울며불며 공항 안을 뛰어다녔다. 무작정 큰소리로 아이 이름을 부르며 헤맸다. 영영 못 찾으면 어떻게 하나,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 저 인간은 그 잠깐도 애를 못 보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낯익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콩알이가 있었다, 백인 여자의 손을 잡은 채! 아, 하나님! 그 여자가 천사처럼 보였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난 콩알이를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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