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틀 톰볼라’를 아시나요?
“엄마, 월요일에 병 갖고 오래요!”
밑도 끝도 없이 감자가 말했다.
“무슨 병? 유리병? 왜?”
콩알이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 주며 물었다. 콩알이는 학교에서 한 판 뜬 것처럼 데리러 가면 머리가 늘 헝클어져 있다.
“몰라. 톰볼라 어쩌고 하던데? 가방에 편지 있어. “
이런, 또 시작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늘 그놈의 편지가 말썽이다. 말하자면 가정통신문 같은 건데 영어를 읽어도, 모르는 단어가 없어도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교 문화와 너무 달라 그런 가정통신문을 받은 날은 온 가족이 퀴즈를 푸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영어를 익숙하게 구사하면 친구들에게 물어보라고 할 텐데 그 정도도 안 되고, 지금 같은 인터넷 문화가 안 될 때라 달리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남편도, 나도 싫어했다. 그건 현지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데 우린 영국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아마 선배 부부가 애들 학교에서 차별당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녁을 먹고 문제의 그 편지를 펼쳤다. 남편도, 나도, 애들도 자못 심각하다. 편지엔 각종 병의 그림과 함께 커다랗게 “BOTTLE TOMBOLA!”라고 쓰여 있었다. 별다른 내용 없이 각종 병을 기부해 달라는 거였다. 도대체 이게 뭘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병 복권‘이었다. 사전엔 딱 한 마디, “TOMBOLA:톰볼라(복권의 일종)“라고 되어 있었다. 우린 혹시나 싶어 전자사전에 종이사전까지 뒤졌지만 달리 풀이된 게 없었다. 애꿎은 가정통신문만 노려 보고 있는데 병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와인이나 맥주, 주스 등 한결같이 유리병으로 된 그림이었다.
“혹시 한국처럼 폐품을 가져오라는 거 아닐까?”
”설마…. 그런가? “
그때만 해도 한국의 학교들은 한 달에 한 번 폐품 수집을 하고 있었다. 감자가 한국에서 다닌 한 학기 동안 폐품을 보냈던 기억이 떠오르며 절묘하게 이 병 그림에 엮인 것이다. 남편과 난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못하며 전전긍긍했다.
“여보,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 얘네도 폐품 수집을 하는 거야!”
그 고민스러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는지 나도 모르게 확신에 찬 말이 튀어나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더 알아보자고 했을 남편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런 것 같네. 당신 말이 맞을 거야. 근데 우리 집에 빈 병이 있어?”
있을 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아야 했던 우리에겐 종이팩에 든 애들 음료나 페트병에 든 음료도 감지덕지하던 때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없지. 내일 테스코에 가서 아무 거나 2병 사야겠네!”
옆에서 조용히 눈치를 보던 감자와 콩알이 얼굴이 환해졌다. 저녁 먹은 게 쓰윽 내려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우린 테스코에 가서 병에 든 음료를 두 병 샀다. 마음 같아서는 와인을 사고 싶었지만 최소한의 지출을 위해 탄산음료를 사고, 덤으로 애들에게 과자를 사주었다. 또 한 번의 난제를 푼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았다. 이제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어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린 집에 돌아와 두 병의 음료를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엄마, 이거 아니래!”
데리러 간 나를 보자마자 감자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가져갔던 음료 병을 내밀었다.
“아니라고? 그럼 뭔데?”
“빈 병이 아니라 새 걸 가져오는 거래! 나 혼자 빈 병 가져왔어! 애들이 막 웃었어! “
감자가 볼 멘 소리를 해대는데 옆에서 콩알이도 빈 병을 내밀었다. 아뿔싸!
“그럼 도대체 보틀 톰볼라가 뭐라는 거야?”
민망해진 나는 짐짓 화난 척했다. 아니, 사실 화가 나기도 했다.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왔는데 좀 자세히 알려 주면 어디가 덧나나 싶은 게 괜스레 선생님 탓을 했다. 그렇게 ‘보틀 톰볼라’는 무슨 뜻인지 모른 체 잊혔다. 그리고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쯤 감자가 소식을 전했다. 학교에서 무슨 페어를 한다고 우리도 오라는 거였다. 또 무슨 낭패를 볼까 싶어 가기 싫었지만 애들이 무척 가고 싶어 해서 할 수 없이 갔다.
감자가 전한 무슨 페어는 기금 마련을 위한 작은 교내 축제였다. 영국 학교는 부족한 자금을 그런 식으로 부모들과 힘을 합해 충당한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 이거구나!
‘BOTTLE TOMBOLA’라고 쓰인 현수막 아래에는 번호표를 붙인 각종 병 제품들이 늘어서 있었고 한쪽 옆에서는 참가비를 내고 제비 뽑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제비 뽑기용 상품을 기부해 달라는 거였다. 그걸 우린 멋대로 폐품 수집이라고 생각하고 빈 병을 보냈으니 애들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애들이 아직 어린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며 또 한 고비의 타국 생활을 넘기고 있었다.
평생 잊지 못할 ‘BOTTLE TOMBO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