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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Apr 12. 2020

미치도록 지루한 불행의 모습

<페스트>에서 까뮈가 말하는 재앙의 민낯

전쟁 영화를 좋아한다.


5년 전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 2차 대전을 그려낸 소설이라는 말에 역동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질병이 창궐한 시점의 충격이 지나고 나니, 막상 소설은 인물과 상황을 매우 권태롭게 그려나갔다.

그 권태로움에 나는 몇 번이고 책을 떠났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며 다 읽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이렇게 끔찍한 질병이 발생했는데, 어떻게 이런 지루함이 그려질 수 있을까.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했을 때 나는 처음에는 밖에 나가는 것조차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출근길 버스 손잡이를 잡는 것, 누군가의 숨결이 내 귀에 들리는 것조차 끔찍했다. 틈만나면 확진자 추이를 보고, 실시간 정부 브리핑을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객관적으로도 상황이 나아지기는 했다만) 신규 확진자가 얼마인지도 매일 득달같이 확인하지 않는다.

마스크라는 작은 불편함이 계속 제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에 조금씩 지쳐갈 뿐, 매일을 초반과 같은 절망과 공포 속에 살게 되지는 않더라.


작품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실 재앙만큼이나 별 볼일 없는 것도 없고, 엄청난 불행이란 그것이 계속된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따분하기 때문이다. 페스트로 인한 끔찍한 하루하루는 모두 다 집어삼켜 버릴 듯 거침없는 기세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밑에 있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릴 듯 끊임없이 계속되는 제자리 걸음과도 같았다.’


당시에도, 지금도 이 문장을 보고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처음 불행이 닥쳐오는 순간은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그 불행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극적이거나 대단하지 않은 것 같다. 하루하루를 버티고 이겨낼 뿐.


코로나로 인해 이 작품이 주목받으면서, 유튜브 민음사TV에서도 작품에 대해 다룬 영상을 올려주었다.

영상을 보니, 당시에는 인물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서 더 루즈하게 느껴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갑자기 조명 받는 이 작품을 보며 ‘난 진작에 읽었지’라는 자부심에 책장에서 꺼내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도 이 유행에 함께 편승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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