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에 올 것이 왔다. 휴식 없이 달려온 방송 제작 일. 방송 PD 10년 차에 찾아온 '번아웃 증후군'
'번아웃 증후군' 이란 바쁜 현대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증상이다. 나 역시 내가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었다. 누구보다 이 일을 사랑했고 내가 제작한 방송이 TV에 나갈 때 보람을 느꼈다.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직업적 사명감을 가지고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해왔다. 하지만 쉼표 없이 달려온 나에게 쉼표가 필요했다. 나의 돌파구는 다니던 제작사를 그만두는 일이었다. 4년 6개월이나 몸담았기에 그만두겠다고 하자 팀장님이 깜짝 놀라 했다. 왜 그만두냐는 팀장님의 말에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그렇다. 나는 다시 행복해지고 싶었다. 아니 도망가 버린 행복을 찾고 싶었다. 행복하려고 우리는 열심히 살지 않는가? 행복을 좇으며 아등바등 바쁘게 살다 보면 어느새 행복은 멀리 사라져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를 위해 '45일 해외여행'을 선물했다. 그리고 45일 중 34일은 산티아고 순례길 780km 걷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은 45일이면 충분히 유럽 전역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인데 왜 그 힘든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냐고 물었다.모르겠다. 왠지 그 길을 걷다 보면 무엇인가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번아웃 증후군으로 지쳐 있던 나를 그 길이 구원해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떠나기 전 산티아고 순례길 관련된 책과 영화를 전부 보았다. 그리고 짐을 싸는 날. 가져갈 것들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속옷과 양말 바지는 기본 3벌 이상에 침낭과 구급약과 후레쉬 등 걸으면서 필요할 물건들은 전부 사서 배낭에 넣었다. 무게가 꽤 나갔다.
드디어 프랑스 생장에서 첫 순례길을 걷는 날.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가야 하는 코스였다. 산을 넘어야 하기에 더욱 힘들었다. 배낭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오르막길에서는 걸음 속도도 느려지고 빨리 숙소에 도착하기만을 빌었다. 함께 걸었던 한국인 동생 3명이 있어서 그나마 힘을 낼 수 있었다.
"이렇게 힘든 길을 내가 한 달을 넘게 걸을 수 있을까? 이러다가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포기해야 하나..."
며칠을 그렇게 걷다가 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바로 배낭 안에 물건들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정말 나에게 필요할까?'
라고 질문 후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빼보기로 했다. 내가 버리기로 했던 물건들은 이렇다.
1. 등산복 바지와 반팔 티셔츠
반팔 티셔츠 4벌 중 1벌을 버리기로 했다.
등산복 바지 역시 2벌 중 갈아입을 바지 1벌이면 충분할 것 같아 1벌을 과감히 버렸다.
양말도 5켤레 중 2켤레를 버리기로 했다.
2. 허리 가방
보조 가방으로 뒤로 메는 가방이 있어서
과감히 버리기로 결정했다.
3. 필요 없는 종이 뭉치들
순례길 정보 관련된 종이들은 휴대폰으로
촬영 후 버리기로 했다.
4. 여행용 멀티 어댑터
무게가 별로 안 나갈 것 같지만
당장 쓰지 않는 물건들이라 버리기로 했다.
모아 놓고 보니 버릴게 이렇게나 많았다. 한국에서 여행을 준비했을 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여기서는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는 오히려 짐이 되었던 것이다. 버리고 나서 다시 길을 나섰다. 배낭의 무게는 전보다 가벼워졌고 내 발걸음과 마음도 가벼워졌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배낭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였는지도 모른다. 배낭을 무겁게 짊어진 순례자처럼 나도 내 인생길을 힘들게 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은 배낭을 가볍게 하고 휴식도 취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가는 길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늦게나마 깨닫는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괜찮다.
2020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지 4년이 돼간다. 나는 다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순례자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본업인 방송 제작과 유튜브를 동시에 하며 강의와 글도 쓰고 있다. 최근에 쉬어본 지가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또다시 인생길이 고행의 길이 되지 않도록 이 글을 쓰며 반성하고 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내 몸 챙겨가며 하자.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갈 수 있도록 하자. 지금의 행복을 놓치지 말고 살자. 조금씩 매일 성장하자. 가벼운 배낭을 메고 인생길을 즐기며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