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힐스빌 생추어리 Healesville Sanctuary
힐스빌 생추어리(Healesville Sanctuary )에 도착해 주빅토리아(Zoo Victoria) 회원권을 샀다. (주빅토리아는 호주 빅토리아의 동물원 기반 보전기관 단체다. '멸종과 싸우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27종의 멸종위기종 보전 및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 것만 있으면 빅토리아주에 있는 와리비오픈레인지 동물원(Werribee Open Range Zoo), 멜버른 동물원(Melbourne Zoo)을 1년 내내 입장권 없이 갈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주에 있는 타롱가 동물원, 퍼스 동물원, 애들레이드 동물원 등에도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나같이 동물원에 자주 가는 사람에게 딱이었다. 회원 카드에 귀여운 마운틴피그미포섬(Mountain Pygmy possum) 사진이 있었다. 아이돌 포토카드를 받은 느낌이 이런 걸까?
힐스빌 생추어리는 '토종 동물만을 위한 곳'이다. 호주에는 오리너구리, 코알라, 캥거루, 태즈메이니아 데빌 등 다른 나라에 없는 특별한 동물들이 많다. 이런 동물들은 인간, 가축, 외래종에 피해를 입고 대부분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그래서인지 호주는 이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기린, 코끼리, 사자 등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동물들을 해외에서 들여왔을 법한데 뚝심 있게 토종 동물에 집중한 모습이 좋았고 더 가치 있어 보였다.
힐스빌 생추어리는 1943년, 동물원에서 최초로 오리너구리를 번식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포유류면서 알을 낳는다니. 호주 캔버라 박물관에 갔을 때 오리너구리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 있다. 원주민들이 오리너구리가 알을 낳는다고 말했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아' 수백 마리를 죽여 알을 찾아냈다는. 언제는 과학적으로 증명하길 원하고, 언제는 증거가 없어도 믿는 인간에 의해 많은 동물이 죽었구나 싶었다.
야행성인 오리너구리 전시장은 어두웠다. 수초 사이로 오리주둥이를 닮은 입이 보였다. 한동안 지켜봤다. 오리너구리는 같은 곳을 계속해서 맴돌며 헤엄쳤다. '아, 여기도 정형 행동인가' 몇십 년간 오리너구리를 키워온 동물원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니 참담한 마음이었다. 동물원마다, 돌보는 사람마다, 환경마다 동물의 삶이 달라질 수 있으나 그래도 동물원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이런 모습을 보면 동물원들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
나와서 야생동물병원에 갔다. 흥미롭게도 모든 것을 드러낸 병원이었다. 수술실, 처치실, 연구실 모두 유리를 통해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마침 처치실에서 앵무새를 치료 중이었다. 위에 달린 카메라가 치료 장면을 보여주었다. 한 간호사가 나와 병원에서 하는 일을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동물원 동물뿐 아니라 매년 2000마리의 야생동물을 치료하고 있었다. 대부분 차에 치이거나 개에게 물려서 오고, 회복한 동물은 적응 공간에서 훈련 후 야생으로 돌려보낸다고 했다.
일하는 도중에 나와서 설명하는 게 번거롭지 않냐고 물으니, 치료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방문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답했다. 인간과 야생동물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리는 일이 매우 의미 있다는 말이 반가웠다. 야생동물 보전을 위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이 곳의 이름은 원래 콜린 맥캔지 경 생추어리(Sir Colin MacKenzie Sanctuary)였다. 맥캔지 경은 1920년 힐스빌에 해부 연구기관을 세우고 그곳에 토종 생태계 보호구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육식 유대류 태즈메이니아 호랑이(Thylacine, 실제 호랑이는 아니지만 몸의 무늬 때문에 Tasmanian tiger라고 불린다. 목축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해 많이 죽였다. 호주 태즈메이니아에서는 1886년부터 1909년까지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1파운드를 지급했다고 한다)가 1930년에 야생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된 후 사실상 멸종하였으니, 당시 토종 동물들의 멸종이 급속화될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았을까.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일본의 해수구제정책으로 호랑이, 표범, 늑대 등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엔도 키미오의 '한국의 호랑이는 왜 사라졌을까'를 보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야생 호랑이가 잡힌 것이 1921년이다. 여전히 호랑에게 물려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이 존재한 데다, 나라를 빼앗기고 힘들게 연명하던 사람들이 가졌을 야생동물에 대한 인식은 현재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인식을 가졌음에도 도로, 개발, 관광 명목으로 남아있는 야생동물 서식지마저 파괴한다. 산양의 터전인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고 하고(2021년에 결국 무산되었다), 담비와 하늘다람쥐가 사는 가리왕산의 나무들을 베어 스키장을 만들고(2017년 완공되어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복원하기로 합의했으나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철새들의 쉼터인 흑산도에 공항을 세우려 한다(2008년 제안 후 섬주민들의 이동권 주장과 환경보호단체의 주장이 충돌하여 결정이 보류됐다. 2021년 1월, 대체 국립공원 지정 변경안을 내놨다).
우리나라에도 힐스빌 생추어리 같은 곳이 있다면 사람들이 야생동물의 중요성을 잘 알고 보호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동물원에서 국내 야생동물들은 일부고, 인기가 없고, 그래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우리나라 야생에도, 동물원에도 국내 야생동물들이 자리 잡을 곳은 부족하다. 국내에는 사냥, 낚시, 자동차 등 인간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야생동물들이 많다. 그런 동물들의 제3지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