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케언즈에서 코아로
케언즈에서 쿠란다를 지나면 숲으로 둘러싸인 코아라는 지역이 나온다. 헬프 엑스(HelpX) 사이트를 통해 이 곳에 사는 사라와 나딘을 만났다. 길이 험하고 물에 잠길 때가 많아 사륜구동 차가 없으면 안 되는 집이었다. 휴대폰은 강제 휴식 상태. 폰으로 인터넷도 전화도 되지 않아 느린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이마저도 너무 느렸다. 가장 가까운 가게도 차로 한참을 가야 나왔다. 그곳에서는 아침 2시간, 저녁 2시간만 일했다.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다. 집에는 닭, 오리, 염소, 양, 개 두 마리가 있었다. 닭들에게 잡초를 뽑아주고, 염소와 양 우리를 청소하고, 개들을 산책시키는 게 나의 일이었다.
여러모로 자급자족, 환경친화적 삶이었다. 닭이 낳은 계란을 먹고 염소젖으로 치즈를 만들었다(사라는 페스코테리언이었다). 채소는 밭에서 뽑아왔다. 빗물을 받아 써야 해서 샤워는 가능한 한 빨리 끝내야 했다. 화장실에서는 재활용 휴지를 썼다. 다행히(?) 수세식 변기였지만 특이하게도 벽이 낮았다. 밖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아침에는 뜨는 해를, 밤이면 별을 보며 용변을 봤다. 자연 속에 사는 기분이 흠뻑 들었다. 사라는 일주일에 세 번 마사지를 해 수입을 얻었다. 나딘은 근처 농장에 가서 일했다. 둘에게 일은 삶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결코 자신의 삶보다 일이 우선하지 않았다.
개인적 삶뿐 아니라 사회적 삶에도 충실해, 코아 지역의 자연보호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하루는 사라가 주변 개발지역을 정찰하러 가는 데 따라갔다. 막혀 있어서 울타리를 부여잡고 사진을 찍다가 막판엔 잡힐까 봐 뛰어서 도망치기도 했다. 스파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딘은 정부의 계획이 서식지 파편화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에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다. 한 시골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용도 변경하며 서식지가 고립되는 문제가 있었다. 흔히 히 말하는 '서식지 파괴'를 추상적으로 '막아야지'라고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 집 입구 울타리에는 '야생동물을 위한 땅(Land for Wildlife)'이라는 마름모 모양의 푯말이 붙어 있었다. 땅 일부를 야생동물을 위해 남겨두고, 농작물에 화학약품을 뿌리지 않고, 가축에게 적절한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30여 년 전 호주 빅토리아 주의 농장에서 새의 개체수가 감소하자 보전 전문가와 농장주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회원이 되면 전문가가 방문해 토종 동식물을 보호하는 방법과 해충을 관리하는 법을 알려주고 목축업과 농업을 자연친화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경험한다. 익숙해서 불편함이나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던 내 행동에 균열이 생긴다. 물을 한 껏 맞으며 길게 했던 샤워도 짧게 하려니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폰이 없는 하루도 충만하게 보낼 수 있었다. 구멍 난 양말을 바느질로 때우고 염소젖을 짜고 잡초를 뽑으면 하루가 다 갔다. 그리고 이제껏 고수해온 내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어떤 방식이 나에게 맞는지도.
코아에서 지내기로 한 보름이 빠르게 흘렀다. 그 사이 중고차를 사고, 수컷 염소 빌리에게 머리로 들이 받치고, 사라와 부쉬 워킹을 하고, 애인과 싸우고 화해하고, 잡초를 뽑다가 쓰러질 뻔했다. 사라에게 가드닝 장갑을 선물로 주고 와인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브린들 크릭 캥거루 보호소로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