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들 크릭생추어리(Brindle Creek Sanctuary)
캥거루 보호소는 코아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애인은 근처 바나나 농장에 일자리를 얻고 나는 보호소에서 지내기로 했다. 원래 오기로 한 봉사자가 있어 사무실에서 자는 조건이었다. 입구에는 동물들이 놀랄 수 있으니 차를 아주 천천히 끌고 들어오라고 쓰여 있었다.
보호소는 그야말로 쓰러질 것 같은 건물 두어 개와 동물들을 위한 방사 적응 공간이 다였다. 도착해 나를 맞은 사람은 6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이름은 데럴. 사랑하면 닮는다던가. 캥거루 같은 외모였다. 마르고 길쭉한 팔다리에 큰 눈망울과 피부색까지 캥거루 같았다. 인기척이 없는 곳에서 감춰뒀던 꼬리를 내놓고 캥거루들과 광야를 뛰어다닐 듯보였다.
보호소는 첫 장면부터 강렬했다. 집 주변에 큰 야생 왈라비와 캥거루들이 서성였다. 데럴은 그 가운데서 와인을 홀짝이며 줄담배를 펴댔다. 강한 억양 때문에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당혹스러웠다. 대강 며칠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독사인 타이팬을 봤다는 것과 자신이 Q Fever에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Q fever는 Coxiella burnetti라는 세균으로 인한 인수공통 전염병이다. 1935년, 호주 퀸즐랜드 도축장 노동자들로부터 발견됐다. 소, 양, 염소가 감염되면 증상은 가볍지만 사람에게는 발열과 폐렴을 일으킨다. 이 질병은 감염된 동물을 다룰 때나 먼지를 통해 감염된다. 그래서 지금도 호주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려면 반드시 예방 접종을 해야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캥거루 똥이 많은 잔디를 깎다가 걸린 사례도 있었다.
캥거루와 왈라비에게 진드기 여러 마리가 붙어 있었다. 진드기는 Q fever의 전파 매개체다. 똥은 도처에 널려 있고 흙먼지가 쌓인 환경을 보니 안 걸리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대럴은 밤에 캥거루들과 같은 침대 위에서 자는 듯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질병에 걸린 사람을 직접 만나다니. 그 순간에는 대럴에 대한 걱정보다 예방접종을 하지 않고 온 것을 후회했다. 타이팬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저 덩치 좋은 왈라비 곁을 떠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과는 오전 7시에 야생 왈라비들에게 루푸드라는 전용 사료를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료통 앞에는 항상 다 큰 캥거루 두어 마리가 기다렸다. 이곳에서 새끼 때부터 자라 독립했지만 자주 찾아오는 친구들이라고 했다. 어쩐지 그 큰 몸을 가지고 자꾸 집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했다.
때는 7월, 남반구인 호주에서는 건기인 겨울이었다. 풀이 많이 자라지 않아 배고픈 왈라비들이 많았다. 한 때는 100마리 이상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고 들었다. 법적으로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면 안 되지만 허가를 받으면 가능했다. 왈라비 수십 마리가 일렬로 늘어서 먹이를 먹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철원에서 본 독수리 떼가 생각났다. 던져준 먹이 앞에 몰려 있던 그 모습과 같았다.
집 안에는 새끼들이 있어 시간에 맞춰 우유를 타 먹이고 총배설강을 휴지로 자극해 오줌똥을 뉘었다. 락토오스를 분해하는 소화효소가 없는 캥거루들에게 일반 우유를 주면 설사를 한다. 그래서 '움바루'라는 호주 회사에서 만든 전용 우유를 먹였다. 연령별로 분유 농도도 달리 나온 제품이 있어 편리했다. 호주에는 야생동물을 구조해 보살피는 일반인 케어러(Carer)들이 많아 이런 회사도 있구나 싶었다. 긴 주둥이를 가진 캥거루를 위한 길쭉한 젖꼭지까지 팔았다. 젖꼭지 끝에 작은 구멍을 뚫어 주둥이에 물리면 작은 새끼들은 아주 조금씩 우유를 삼켰다. 폐로 들어가지 않게 잘 조절하는 게 중요했다.
데럴과 함께 일하는 헬리나라는 나이 지긋한 폴란드 여자분이 있었는데, 특히 새끼들 가운데 휩테일왈라비인 '프린세스'를 무척이나 아꼈다. 프린세스는 가장 작고 잘 먹지 않아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동물들을 돌보며 사는 헬리나가 참 존경스러웠다. 다만, 그녀는 오그라드는 목소리로 프린세스에게 폴란드 말을 아주 많이 했다. 모두 사랑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지만 조금 힘들었다. 나중에 야생동물 전문가가 말하길, 야생동물을 대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안정감을 준다고 해 그녀가 떠올랐다.
방사 적응 공간에 있는 어린 캥거루들에게 밥을 주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유치원생들 같았다. 태어난 지 1년 전후라, 먹는 양과 성장 속도가 남달랐다. 새끼들과 다르게 우유병을 내밀기만 해도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했다. 고구마도 두 앞발로 잘 받아먹었다. 먹고 나면 천으로 만든 주머니에 쏙 들어가 팔자 좋은 한량처럼 쉬었다. 밤에도 꼭 주머니 안에서 잤다. 어미의 주머니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보이면 들어가고 싶은 본능이 있는 게 정말 신기했다. 다 크면 그런 습성이 사라지고 땅에서 잔다는데 만약에 성체가 들어갈 만큼 큰 주머니가 있다면 그래도 안 들어갈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시간이 흐르며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었다. 물론 오줌과 똥 범벅이 된 주머니와 패드를 빨고, 우유를 만들고, 설거지하느라 바빴지만 일과 사이 쉬는 시간에 새끼 캥거루를 품에 안고 있으면 따뜻해서 잠이 잘 왔다. 자연 속에 있으니 세상사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대럴이 골프장으로 구조를 나가자고 했다. 어미를 잃은 새끼가 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