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 ybacchus@naver.com] ‘마리오네트’(엘버트 반 스트리엔 감독, 2020)는 그 주제 의식만 제대로 파악한다면 꽤 흥미로운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미국의 아동 심리 치료사 메리언은 남편과 휴가를 떠났다가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스코틀랜드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말수 적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는 10살 소년 매니를 담당한다.
매니 역시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맥켈렌에게 입양되었다. 트라우마를 이겨 내지 못하던 메리언은 중고 서점을 운영하는 키런을 만나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그런데 매니의 그림이 현실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키런의 죽음까지 그림으로 예고한다.
자신의 인생을 매니가 조종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분노한 메리언은 급기야 그를 납치해 사살한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도 쏜다. 그러나 깨어난 메리언은 미국에서 남편과 평범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메리언은 무신론자였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입한 독서회에서 유신론자들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이 작품에는 인문학 출신들에게는 머리가 지끈거릴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불확정성의 원리 등 양자 역학이 자주 거론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고양이를 상자 안에 넣고 죽을 확률 50%의 확률로 설정한다. 뚜껑을 열어 보기 전까지 이 고양이는 살아 있을 확률이나, 죽었을 확률이나 똑같이 반반이다.
즉, 사고 실험인데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과 형상이 귀납, 연역, 실험(과학) 등의 증명으로 정확하게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진실(현실)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 거창한 테제는 결국 창조론(결정론, 운명론)이냐, 목적론(자유 의지)이냐의 논제이다.
특정 종교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신화와 전설은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자에 의해 세계와 생명이 만들어졌다고 전승한다. 하지만 다윈 이전에 이미 우리는 진화론으로 생명의 비밀을 풀었고, 그 후 빅뱅 이론으로 우주의 신비를 알아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운명론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난제로 남아 있다.
마리오네트는 꼭두각시이다. 만약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와 이 세계가 신의 피조물이라면 우리는 마리오네트에 다름 아니다. 각자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고 아무리 용을 써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과학이 모두 옳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만약 그렇다면 유신론자나 특정 종교인들은 모두 바보에 불과할 테니. 게다가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수많은 신비주의와 기적은 조작 아니면 주작일 테니. 감독은 현실주의와 ‘매트릭스’의 ‘호접몽론’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한다. 사실 메리언과 주변 환경은 매니가 만들어 낸 허구적 설정이었다.
메리언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녀의 시선에서 플롯이 전개되도록 설정함으로써 절묘하게 관객을 속이는 기법을 구사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감독은 유신론자와 신비주의자를 지분거리거나 서분거린다. 하지만 끝에 메리언에게 자아를 형성해 주고 스스로 매니의 피조물임을 깨닫고 평안을 찾게 만든다.
그건 “당신들은 신의 마리오네트일지도 몰라.”라는, 가슴 서늘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다. 그러면서 니체의 영겁 회귀 법칙까지 거론한다. 마치 “당신들이 목적론 운운하며 자유 의지를 불태워 봤자 쳇바퀴 속의 다람쥐일 뿐.”이라고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매니는 왜 그런 걸 창조했을까?
메리언이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게 만들게끔 만든 게 답이다. 그녀는 수시로 ‘만약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만약 시간을 조금만 달리했다면?’이라고 후회하며 남편을 되살릴 방법을 간구하고, 또 죄책감에 휩싸여 산다. 바로 매니 자신이 부모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 아님에도 자책감에 휩싸여 있는 것.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세상과 단절한 채 그림으로 허구 세계를 창조해 그 속에서 사는 것. 심지어 자신을 친자식 이상으로 아껴 주는 맥켈렌에게조차 마음의 문을 닫은 채. 그렇게 미스터리 스릴러로 진행되던 이 영화는 마무리에 가서는 암연의 통증을 안겨 주면서 가슴 한 편을 깊게 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