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 ybacchus@naver.com]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2001년 ‘고양이를 부탁해’로 데뷔할 때부터 심상치 않은 연출 실력을 보인 정재은 감독의 다큐멘터리이다. 무대는 서울 동쪽 끝의 둔촌주공아파트. 단일 단지로서 최대 규모인 6000세대를 자랑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낡아 재개발이 결정되었기에 거의 떠나고 17세대만 남았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는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고, 밤에는 공포감마저 자아낼 정도이다. 이 슬럼화된 동네의 주인은 300마리 정도의 고양이들. 입주자 혹은 인근 주민들은 ‘둔촌냥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먹이를 주고, 중성화 수술을 해 주며, 입양 및 근거리와 원거리로의 이동을 도와주고 있다.
감독은 주축 인물인 김포도(디자이너, 일러스트 작가), 이인규(‘안녕, 둔촌주공아파트’ 발행인), 전진경(동물권 행동 카라 대표) 등 세 명의 ‘캣맘’의 인터뷰, 그녀들과 고양이들의 동선을 통해 이야기를 펼쳐 간다. 감독은 도대체 ‘왜?’ 길고양이의 거주지와 생존 문제에 그토록 거창한 테제를 던진 걸까?
먼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개되어 화제가 된 길고양이 화형 동영상.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15만 명이 ‘길고양이를 학대하는 갤러리를 폐쇄하고 엄중한 수사를 해 달라.’는 의견에 동의해 경찰의 정식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만큼 은연중에, 아니 공공연하게 동물 학대(살상)가 만연되고 있다는 증거.
그렇게 길고양이는 인간이 마음대로 죽이거나, 혹은 살리거나 할 수 있는 소모품이 아니라 동등한 생명체라는 인식을 갖자는 웅변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고양이를 별 고민 없이 입양했다가 아무렇지 않게 길거리에 내던지는 파양을 하는 행동 역시 안 된다는 계도적 메시지가 패키지로 담겨 있다.
즉, 그것은 결코 인권과 다를 바 없는 동물권이다. BC 5세기의 프로타고라스 이래 인류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며 지구의 주인임을 오만하게 외쳐 왔다. 그런 이유로 인간의 손과 인간이 만든 환경은 수많은 동식물의 종을 멸종시키는가 하면 돌연변이 생명체들을 ‘창조’해 왔다. 코로나19가 인간 탓이듯.
우리는 마음대로 길을 내고, 깊은 수로를 만들며, 벽을 세워 생명체들의 자연스러운 이동을 제한하거나 고립시켰다. 야생 동물이 논밭을 파헤치는 건 그들의 생태계가 교란되어 생존 환경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주어진 문명은 자랑할 만하지만 다른 종을 파괴할 권리는 아니라는 걸 웅변한다.
“(사람은 자신이 없으면 고양이가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고양이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전진경의 대사이다. 고양이는 우리가 애써 보살필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권과 결코 다르지 않은 동물권을 존중해 줘야 할 동등한 생명체라는 것을 먼저 깨닫는 게 문명의 혜택에 따르는 책무라고.
대부분의 포유동물이 그러하듯 고양이 역시 삶의 터전을 바꾸지 않는 정주성 동물이다. 그런데 둔촌주공아파트는 굴삭기, 크레인, 포클레인 등에 의해 해체되고 있는 중이다. 애초에 고양이를 그곳에 살게 만든 건 사람인데 사람이 고양이를 내쫓으려 하고 있다. 그건 단순한 폭력 이상의 위협이다.
2021년 국토교통부에서 발표한 2020년 주거 실태 조사에 따르면 자가 보유 비율은 전체 가구의 60%였다. 수도권 저소득층의 자가 보유 비율은 약 34%였다. 1인 가구가 30%를 넘어가고 있다. ‘고향’을 잃을 길고양이들을 통해 감독이 외치고자 하는 또 다른 주제, 효율성이 낳은 도시 생태계 문제이다.
건물을 짓고, 허무는 주체는 정부(권력)와 기업(자본)이다. 소시민이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결정하는 대로 돈이 있으면 입주하고, 능력이 안 되면 자꾸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밖에는 없다. 부동산으로 이익을 볼 수도 있지만 결정권자들이 벌어들이거나 얻어 가는 것에 비교하면 ‘벼룩의 간’일 따름이다.
이토록 도시의 발전과 신도시의 건설은 야생 동물과 반려동물은 물론 경제적 약자들까지 외곽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감독은 약자들이 길고양이 신세와 다르지 않다는 서늘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황량한 폐허가 된 재개발 단지를 부감으로 보여 주는 마지막 시퀀스는 참불인견이다.
주류(중, 상류층)에 끼지 못한 서민들의 상처 난 속내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항대립 중 하나로 구성주의와 해체주의가 있다. 어떤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데 폐허가 된 아파트는 구성주의의 손을 들어 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아파트는 그것과 매우 밀접하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수의 국가들에게 아파트는 주거 공간의 대세이다. 한정된 땅덩어리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도 있지만 인간이 공동체 생활에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과 더불어 위용을 자랑하고픈 과시욕도 동시에 갖췄다는 데에서 아파트는 안성맞춤이다. 그게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의 정체성이다.
6000세대에서 자기 집은 6000분의 1에 불과하지만 대외적으로는 6000세대라는 거대 사이즈를 자랑해도 이상할 게 없다. 유사한 아파트라면 대규모 단지 쪽이 더 비싼 게 현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직장이나 직위를 자랑한다. ‘나 하나’일 땐 별 볼 일 없지만 공직이나 대기업 부장이라면 위상이 달라진다.
물론 구성주의의 함정도 없지 않다. 부분은 부분 자체라기보다는 전체의 일부로 평가될 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래서 해체주의가 대두된 것이다. 그런데 이 구성과 해체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다. 권력과 금력이 결정한다. 고양이의 시각으로 제작된 만화에서 사람은 ‘캔 따개’라고 한다. 17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