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모 Apr 13. 2022

‘오늘부터 우리는!!’, 포복절도 ‘병맛’ 코미디

[유진모 ybacchus@naver.com] ‘오늘부터 우리는!!’(후쿠다 유이치 감독)은 니시모리 히로유키의 코믹 학원물 만화를 원작으로 한 키치적 감성이 풍부한 B급(‘병맛’) 코미디이다. 아케히사 고교, 난요 고교, 베니 고교가 인접한 한적한 마을. 아케히사의 양대 ‘짱’ 사토시와 사가라가 떠난 이후 난요의 미츠하시와 이토가 패권을 잡았다.


둘은 불량스럽지만 천성이 착한 데다 베니 ‘짱’ 이마이와 친구 사이라 동네는 평화롭다. 그런데 이웃 동네의 호쿠네이 고교가 화재를 당하는 바람에 그 학생들이 아케히사의 빈 교실에서 수업을 받게 되면서 평화가 깨진다. 그곳의 양대 산맥인 오타케와 야나기가 워낙 강하고 야비해 동네를 평정하는 것.


미츠하시는 합기도 소녀 이코와, 이토는 여고 ‘짱’이지만 요조숙녀인 척하는 쿄코와 각각 사귄다. 아케히사의 사토루는 ‘범생이’라 호쿠네이 불량배들에게 심하게 당한다. 사촌인 검도 소녀 료코가 엉망진창인 사토루의 얼굴을 보고 닦달하자 그녀가 겁을 먹게끔 미츠하시라고 거짓말을 둘러댄다.


하지만 료코는 죽도를 들고 미츠하시를 공격한다. 도망간 미츠하시를 찾던 료코는 이마이를 만나자 그가 갈 만한 곳을 묻고 함께 찾아낸다. 곤경에 처한 미츠하시는 이마이를 모함하고, 그걸 믿은 료코는 이마이를 때린다. 왠일인지 호쿠네이 불량배들에게 당하는 사토루를 오타케와 야나기가 구해 준다.


미츠하시의 말을 들은 이토는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사토루를 찾아간다. 사토루를 추궁해 자신의 추측을 확인한 순간 오타케가 나타나 이토를 간단히 제압한다. 오타케는 최강이었고, 야나기는 칼을 사용해서 또 최강이었다. 아케히사의 함정에 걸린 야나기는 칼을 휘둘러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렇잖아도 경찰의 수사선상에 올라 있던 야나기는 사토루가 제 발로 경찰서에 가서 범인이라고 거짓 자백하게끔 오타케와 함께 음모를 꾸미는데. 드러내놓고 캐릭터와 상황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의도적으로 유치하게 연기한다. 모든 시퀀스는 어리숙한 교사들이 모여 합주하는 시퀀스처럼 불협화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숙하다거나, 저질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고 오히려 B급 특유의 깊디깊은 해학적인 유머가 펼쳐진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이다.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학생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 우리도 그 반대편에 폭력과 일탈을 일삼는 고교생들이 존재했었다.


그 고교생들은 곧이곧대로 학생이면서 야쿠자 조직의 은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경찰이다. 아케이사의 피해 학생이 교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며 호소하자 교사가 파견 나와 있는 호쿠네이 교사의 영역이라고 핑계를 대며 외면하는 시퀀스는 담당 구역 외의 사건에 대해 원칙만 주장하는 경찰이다.


호쿠네이 불량배들은 아케히사 학생들에게 5000엔짜리 열쇠고리를 구매할 것을 강요해 사면 봐주고, 안 사면 폭력을 행사한다. ‘조폭’이다. 그 고리에 ‘사랑과 평화’라는 글씨가 인쇄된 것은 이 세상의 아이러니를 의미한다. 그 극악무도한 깡패들의 입에서 ‘정의’라는 말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칼만 있으면 천하무적.”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야나기는 권력을 등에 업고 제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법, 질서, 도리 등을 무시한 채 폭주하는 ‘양아치’를 의미한다. 미츠하시, 이토, 이마이는 비록 불량 학생이지만 나름의 규칙은 지킨다. 약한 자, 특히 여자를 괴롭히지 말 것과 보호할 것 등이다.


약한 자가 당하는 것 역시 외면하지 말고 돕는다는 철칙도 있다. 그들은 이 사회에 그나마 남은 정의와 질서, 그리고 이타심을 의미한다. 아케히사를 떠난 사토시와 사가라는 한때 야쿠자에 몸담았지만 이내 회개하고 고철 공장에서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군데에 모여 마지막 결전을 치를 때 경찰차 사이렌 소리를 듣고 모두 혼비백산 도주한다. 그런데 그건 교사들의 효과음이었다. 공권력은 서민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힘을 받았지만 그걸 제대로 전력 질주하는지, 적재적소에 발휘하면서 국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 영화는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가려진 난센스로부터 뻔한 난센스로 옮아가는 것이다.”라고 쓴 비트겐슈타인으로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갑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형들의 자살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애초부터 아버지의 뒤를 잇기를 거부했다. 아버지 사후 엄청난 상속금을 다 기부했다.


그렇게 평생을 검소하게 산 천재이지만 줄리언 벨의 풍자시처럼 ‘난센스한 말들을 하고, 수많은 말들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침묵하라는 자신의 맹세를 깨며’ 살았다. 이 영화 안의 모든 상황과 인물들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모든 배우들의 연기 솜씨까지 훌륭해 포복절도할 재미를 보장한다. 15일 개봉.

작가의 이전글 ‘복지식당’, 복지 행정 묻는 서늘한 누아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