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애 Jan 04. 2024

할머니의 정원

돌담에 햇살이 비친다. 돌담 아래로 바람이 지나가는가, 풀들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저 바람에 나도 흔들려볼까나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생각한 대로 바람은 상큼하게 내 몸을 감싼다. 아침의 신선함이 느껴졌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마을길로 향한다. 가족들과 여행 가서 머물렀던 제주도 대정리는 주민들이 사는 조용한 마을이라 아침 풍경도 한적했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만난 이웃집 담벼락에 다육이가 한가득 피어 있다. 까만 돌에 피어난 다육이의 모습이 너무도 운치있어 사진을 찍는데 지나가던 할머니가 집안에 더 많으니 들어가 보란다. 

"에이 남의 집인데요." 

"괜찮아요. 구경해도 돼."

안쪽을 빼꼼히 들여다보니 집안으로 연결된 돌담은 물론이거니와 제법 큰 마당이  다육이로 둘러싸였다. 마침 마당에 주인인 듯한 할머니가 계시기에 다육이가 참 예쁘다 했더니 들어와 구경하란다.

집안의 앞마당은 물론 뒷마당에도 다육이가 가득하였다. 돌담에서, 전등 갓을 활용한 다양한 화분에서, 마른 나무 그루터기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다육이를 살펴 보니 그 정성이며 감각이 보통이 아니다. 

할머니에게 감각이 참 좋다고 말씀드리니 안쪽 화단의 새를 보여 준다. 살아있는 나무를 새 모양으로 조각하였는데 화단에 초록 이파리의 새가 여러 마리다. 그 옆에도 다양한 모양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모두 할머니의 작품이란다. 

"예술가시네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나무를 보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 그 그림대로 만들지."

할머니를 따라 둘러본 화단에는 나무도 꽃도 다양했다. 

  "이건 '자란'인데 내가 번식시켜서 마을길에 다 심었지. 열흘 정도 지나면 마을길에 보랏빛꽃이 환하게 피어날 거야."

고개를 돌려 마을길을 바라보니 자란이 길을 따라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몇몇은 벌써 꽃을 피우기도 했고. 꽃이며 다육이며 나무가 잘 자라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금손인가 보다고 칭찬하니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으신다.

할머니는 예전부터 나무나 꽃 가꾸기를 워낙 좋아하셨단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시어머니 눈치 보느라 가꿀 수 없었다고. 며느리가 나무만 가꾸고 집안일을 소홀히 한다 생각했는지 나무를 뽑아 버리기도 했다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으셨다.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에야  맘껏 꽃과 나무를 키웠지. "

마당을 둘러볼수록 다육이의 배치나 화단 구성이며, 나무조각에서 할머니의 뛰어난 감각이 느껴졌다. 할머니에게 그림을 배우시면 참 잘 하실 것 같다고 권하였더니 그림은 기본이 안 되어 있어 어렵다 말하면서도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북에서 다녔던 초등학교의 담임선생님이 미술 선생님이셨는데 붓을 떼지 않고 토끼며 새를 그리는 모습이 너무 멋졌다고. 그때는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선생님을 따라 많이 그렸고 칭찬도 많이 받았단다. 

"그런데 뭐....."

말끝을 흐리시는 할머니에게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어쩌면 묻혀버린 할머니의 꿈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할머니의 손은 바쁘다. 돌담 한켠에 떨어진 꽃잎에서 나온 다육이싹을 흙이 조금 있는 곳으로 옮겨주고 떡잎도 따준다.

"불쌍하지. 이렇게 거친 돌담에서 살아야 하니. 그래도 이렇게 조금이라도 흙이 있는 곳을 찾고 물길을 찾아서 뿌리 뻗고 살아내는 것이 신기하지? 여기 봐. 얘들이 잘 자라는건  이웃집 텃밭에서 돌담으로 물이 흘러들어서야."

다육이를 알뜰살뜰 살피고 있는 할머니를 보니 어쩌면 할머니도 저들처럼 거친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북에서 내려와 여기 남쪽 끝 제주도에 터 잡고 산 세월에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을까?  올해 여든 살이라는 할머니는 이제 들일은 안 하고 집에서  화초만 키우신단다. 화단관리에 허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시지만 표정은 한없이 편안해 보인다. 원하던 삶을 살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할머니처럼 누구나 가슴속에 소망 하나씩은 품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살다보면 삶의 어느 순간에라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듯하고. 그래서 살만한 건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