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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여행의 이유(김영하), 현재를 찾는 일

by 영복


이 책의 작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소설가, 김영하 작가다. 대학교 졸업부터 매년 여행을 다니면서 그 느낌과 그 기록을 상세히 적어둔 책인데, 사실 여행 안내서라기보다는 여행에 대한 자신의 소회 정도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추방된 일로 시작하는 책은 대학교 때의 민주화 투쟁의 기억을 불러내고, 여행지에서의 썸바디, 노바디 등 공감가는 일들과 구절을 잘 풀어내고 있다.



p.82.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처음에 해외 여행을 갔을 때 주변에서 한국말로 하는 대화가 들리지 않아서 굉장히 불안했던 경험이 있었다. 흔한 음식 하나 시키기가 어려웠고 구글맵이 정확하지 않을 때는 박물관을 찾아가는 일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가는 이유가 이리저리 치이는 바쁜 현실 속에서의 도피라면 사실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오히려 긍정적인 일이다. 그곳에서 나는 철저히 그 나라 말을 모르는 여행객일뿐이다. 나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나는 나의 계획과 때로는 무계획으로 여행을 하면 그만이다. 걱정할 일은 현실에서의 나의 미래가 아니고 고작 오늘의 저녁메뉴이다. 이런 상황에 직업 특성상 무시할 수 없는 고국에서 나를 찾는 전화나 문자가 오면 차라리 내가 한국어를 못 알아들었으면 싶을 때도 있다. 여행에서는 온전히 모국을 잊고 싶을 때가 있다. 어쩌면 모국에서의 현재를 잠시 과거로 두고 타국에서의 현재에 모든 걸 쏟고 싶어서 비행기 표를 끊는 건 아닌가 싶다.



p.147.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간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20대 후반에 친구와 처음으로 한달간 동유럽을 갔었다.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오스트리아로 가는 비행기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서 환승까지 2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친구와 점심을 먹고 면세점을 구경했다. 이때까지의 나는 해외 여행이 많지 않아서 탑승시간 안에만 비행기를 타면 되는 줄 알고 여유있게 구경했는데, 나의 여유와는 다르게 공항 내 방송에서 계속 내 이름을 외쳤다고 한다. 빨리 탑승하라고... 나는 영어로 불리는 내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부르는지도 몰랐고, 내가 그 시간에 도착해야하는지도 몰랐다. 부랴부랴 도착한 게이트. 그 앞에 서 있던 승무원은 엄청나게 무서운 표정으로 No, Get out, you can't take this airplane? 뭐 이정도로 얘기했다. 환승 비행기를 놓치다니, 일정이 헝크러진 건 물론이고, 비행기를 다시 예약해야해서 친구한테도 굉장히 미안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불쌍한 표정을 지어서였을까... 살며시 다시 문을 열어주던 그 승무원. 아직도 그 환대를 잊을 수가 없다. 낯선 유럽에서 처음으로 받는 배려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마움을 담은 땡큐로 보답하고 다음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결국 이 분의 배려 덕에 나는 친구에게 덜 미안했으며, 우리의 동유럽 여행 시작이 오히려 즐거운 에피소드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분에게 직접 보답은 못하겠지만 언젠가 한국으로 여행오는 외국인을 만나면 이때 받았던 나의 환대를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다.


올 2월에 와이프와 태국 여행을 가기로 하고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했었다. 와이프의 컨디션 난조로 우리의 여행은 취소되었지만, 실패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졌던 우리의 설렘과 기다림들은 여행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이었을것이라고 믿는다. 여행이 주는 새로운 세상과 경험뿐만 아니라 이러한 계산할 수 없는 오차들속에서 여행은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 나는, 이제 곧 세 가족이 함께 비행기를 타는 순간들을 꿈꾸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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