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 가는 나이

2020년의 끝자락

by 김윤철

운동 가는 길에 은행 열매를 밟았다. 기분이 요상. 열매는 구리다는데 잎은 쓸었으니 열매는 청소 뒤에 떨어진 모양이다. 길가 학교의 담쟁이들도 잎을 떨구고 있다. 완전 가을 느낌. 백수라 별 느낌이 없지만 시월도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할배의 감상.

"가을이 가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있다."

세상 통달할 나이지만 쓸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서 SNS로 연락이 왔다. 소식 없던 친구와 어찌 연락이 닿았는데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들었단다. 시국이 지금인지라 문안을 갈 수도 없고 그 친구도 전화상으로 신신당부를 하더란다. 부담만 주니 제발 모르는 척해달라고.

"너는 멀리 있으니 부담이 덜 될 것 같아 연락하니 모르는 척하고 있어라."

이 친구도 1년에 네 번씩 정기 검진이 필요한 친구다. 나 역시 마찬가지. 병원에 있는 친구의 마음 다른 이들보다 몇 배 더 이해. 라떼의 말 "동병상련."

이 친구도 나이가 연세다. 세월과 관계된 멋진 말 몇 마디 정도는 꿰고 있다.


"앞만 보고 땡감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홍시다."


땡감과 나!

학창 시절 내 별명은 영감이었다. 물론 대감 밑의 영감은 아니고 그냥 동작도 느리고 약간의 노안 영향까지. 절친들은 땡감이라 부르기도. 군 시절 선임의 말. "참 별명대로 논다." 굼뜬 동작의 영감. 익기 전의 땡감. 그래도 왠지 정감이 가는 별명. 그때도 싫은 별명은 아니었다 "어이 영감!" "와!"


직장 생활할 때도 내 얼굴은 노안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처음 보는 동급생에게 선배 대접받은 기억도 있다.

그때는 별다른 기분이 없었는데 나이 들 수록 노안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은퇴. 지금은 내 나이를 찾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얼굴에 살집이 없었다. 주름이 많으니 노안이 될 수밖에. 백수 생활을 하니 마음도 편하고 병원 신세 후 매일 적당한 운동을 해주니 체중이 거의 10kg 정도 불었다. 얼굴이 통통.

자신감이 생기니 옷도 캐주얼하게.


아내와 TV 시청을 하다 내 연배의 배우를 보며 물었다.

"와 저래 늙어 보이노!"

"거울이다. 지 나이 어데 가나!"

요즘 말로 "근자감."

젊어 보이는 게 아니고 제 나이 찾은 것이다.


일흔 넘긴 나이. 친구가 보내온 한탄.

"앞만 보고 땡감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홍시다."

여기의 땡감은 절대 네버 나쁜 말이 아니다. 홍시도 듣기 싫은 말만은 아니다.

요즘 유행어 하나.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 가는 나이.


코로나로 생긴 풍속도 하나. 계좌 번호! 참 애매하다. 이 친구들은 내 퇴원 시 축의금 보냈는데. 모르는 척하라니! 어쩌지?


코로나 때문에 재경 친구들 망년회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거실 벽에는 2021년 달력이 걸려있다. 아내가 병원에서 가져온 것이다. 제일 앞 장은 아직 올 12월! 세월은 쉬는 법이 없다.


폰에도 올 한 해 마무리 잘하라는 덕담들이 올라온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로 상징되는 한 장 남은 달력. 끝은 대부분이 흰소 띠 해의 축복! 그나마 신축년이 빠진 글이 많은 것은 디지털의 힘? 아니 코로나의 힘이겠지. 한자로 된 새해 이름 대신 건강 걱정이 주를 이룬다. 그렇지 우린 70대! 라떼 표시 좀 내자. 신축년! 흰소의 해!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올 2020년을 되돌아보니 다사다난이란 말을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다. 분명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래된 경유차 폐차. 나이와 건강 문제로 운전 포기. 대중교통 기피로 집 앞 탄천 운동 외에는 집콕. 국가적으로도 언론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또 몇 명의 청와대 앞 시위. 우리나라 일, 이 위 도시의 지자체장 보궐 선거, 미국 대선 등등. 대한민국은 미국 대선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나라!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을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놈이 다 삼켜 버렸다. 모든 사회 활동, 친구들 모임, 배움 같은 노년의 즐거움이 코로나란 이름하에 모두 없어져버렸다. 지금 하는 일이라고는 생태 보전에 대한 봉사활동 하나와 도저히 실감 나지 않는 비대면 배움 하나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코로나 하나로 귀결된다. 다사다난이 아닌 일사 다난! 손주들과의 즐거움까지 이 녀석이 삼켜 버렸다.


라떼 세대에다 건강 문제까지, 국가 일에는 신경 쓸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하긴 2020년에 20세기를 더 많이 산 내가 신경 쓸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내 몸보다 소중한 것은 없는 듯! 디지털로 무장한 젊은 세대! 나는 그들을 믿는다. 딸도 생전 처음 가보는 미국 땅, 폰 하나만 있으면 어디던 찾아간다. 손가락 두 개면 못 하는 게 없는 신인류란 느낌! 국가일은 젊은이들에게.


오늘 컴으로 영화 뉴스를 보다 깜놀! 점 하나를 잘 못 찍은 줄 알았다. 관람률 1위란 뉴스를 1주일 넘어 본 “이웃사촌”이란 영화의 누적 관람객이 30만이 안 된다. 천만 관객이란 소리는 정녕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가! 코로나 정말 무섭다.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후광이 사라질까 두렵다. 영화 강국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우리나란데. 미국 할리우드에서 느낀 점. 영화의 힘 무섭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자동차 수 백만 대의 수출과 맞먹는다는 얘기.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 전파의 힘은 더 하다는 것을 영화 기생충과 방탄소년단을 통해 절감했다.


2002년의 “대한민국 짜자자작” 그 열기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하는데 관중 없는 축구장이 웬 말! 음주가무 즐기던 민족의 후예답게 공연장을 뒤덮던 떼창! 폴 메카트니도 감동받았다던 “헤이 쥬드의 후렴구” 끝없이 이어지던 “나나나 나나나나......” 지금은 관중 없는 경기장과 공연장에 랜선이란 낯 선 단어 하나!


100세 시대! 70년이 그렇게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우리 세대는 참 많은 것을 겪었다.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하던 패티 킴이란 가수의 이름이 김혜자로 바뀌고 어머니의 애창곡인 “동백아가씨”가 왜색이란 이유로 방송에서 사라지고 12시부터 4시까지의 통금. 그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경우는 70 평생 처음이다.


다음 주에는 한 번의 일 대 일 대면 수업과 한 번의 비대면 수업이 있다. 대면 수업은 노친네들 상대의 폰 강의. 마스크 꼭 끼고 방역 수칙 지키면서!


제발 내년에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 호랑이와도 싸운다는 소. 그것도 흰소의 힘으로 이 망할 놈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물러가서 하고 싶은 것 하고 살기를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