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이 내게 하려던 말

"내 뒤로 닫힌 문과 내 앞에 열리지 않은 문, 삶이 나를 이끄는 방법"

by 나오나무


길 왼편으로 보이는 호수는 윤슬로 반짝입니다.

이제 이 아름다운 출근길을 지나는 것도 몇 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산과 호수, 햇볕 사이를 천천히 지나면서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퇴직하면 유독 이 길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바깥 풍경과 제 마음은 시간이 멈춘 듯이 고요하더니, 마음 한 귀퉁이에서 아기 도깨비처럼 불안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퇴직을 받아 든 내게 제일 먼저 찾아온 손님이었던 불안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아침에 직접 대면하고 보니 그 몰골이 초라하기 그지없어 실망할 뻔 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제가 그 짝이었습니다.

저 허황한 것에 가슴이 내려앉고 멀미를 하였다니!


환한 고요 앞에서 불안의 정체는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불안은 자신이 누리던 것을 잃게 될까 안달할 때 찾아옵니다.

또 불안은 내게 오지 않은 불행을 미리 상상할 때 찾아옵니다.

퇴직을 앞둔 제게도 예외 없이 불안이 찾아왔고, 저는 달그림자 소리에도 일렁이는 촛불처럼 불안에 흔들렸습니다.

돌아보니 30년간 직장이 제공했던 안정과 익숙함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바닐라 라테처럼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이 주는 달콤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달콤한 혜택을 더 누리지 못할 것을 상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어리석은 것은 퇴직하면 퇴직 이전보다 더 기쁜 일이 찾아올 수 있다는 긍정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저는 스스로를 과거에 묶어놓고서는 미래를 마중하지 못하고 있는 꼴이었습니다.

이것이 멀미의 원인, 불안의 정체였습니다.


이제 제가 누려왔던 안정의 유효기간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더 누리고 싶은 욕망은 용서되지만,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젊은 어느 때 알 수 없는 운명으로 풍덩 뛰어들었듯이, 이제 알 수 없는 운명을 향해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퇴직이 저에게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퇴직이 발등에 떨어지고서야 저는 퇴직 30일 전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 30일 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미래가 저를 활짝 반기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선생들의 선생(the teacher’s teacher)이라고 불리는 교육사상가이자 영성가인 파커 J. 파머도 한때는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주1)

그때, 그는 이렇게 절망했습니다.

“내 앞에서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그러나 내 뒤에는 수많은 길이 닫히고 있지.”

하지만 그는 오랜 방황 끝에 긍정 하나를 길어냈습니다.

“이 역시 삶이 나를 준비된 길로 이끄는 또 하나의 방법이지.”


잠시라도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순탄치 않은 인생의 민낯을 만나게 됩니다.

뒤에서는 길이 닫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야멸차게 엉덩이를 걷어차며 어서 꺼지라고 호통칩니다.

반면에 앞을 바라보노라면 미래는 육중한 성문처럼 요지부동입니다.

미래가 엄마처럼 다가와 우리를 와락 껴안았으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미래의 문은 단 한 번도 스스로 열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미래의 문을 두드립니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한 번 두들기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고, 열 번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학교 졸업 때는 실업자로 살아갈까 두려웠고, 청혼하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을지 두려웠고, 중간항로 시기에는 내 삶이 웅덩이에 빠져서 꼼짝도 못 할까 불안했습니다. (주2)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퇴직을 통보받았을 때는 지진이 난 것처럼 삶이 묵직하게 흔들렸습니다.

이번에는 웅덩이가 아니라 절벽에 선 느낌이었습니다.


파머의 고백을 읽다가 옛날 외가집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적 외할머니는 두부를 만들 때면 하얀 면 보자기에 순두부를 넣고 그 위에 맷돌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러면 천천히 간수가 빠지면서 탱글탱글한 두부가 완성됩니다.

맷돌 무게만큼의 고통을 이고서야 온전한 두부로 변한 것이지요.

파머가 그랬듯이 뒷길이 닫히고 앞길이 막혔을 때, 우리는 절망을 경험합니다.

어쩌면 그 절망은 순두부의 맷돌 역할이기도 하겠지요.

닫힌 문과 열리지 않는 문 사이, 그렇게 숨 막히게 비좁고 어두운 틈새에서 우리는 새 길을 열망하게 되고서야 진정한 자기 삶으로 향하는 문을 두들길 수 있게 됩니다.


만약 길이 항상 열려 있다면 정말 기쁘기만 할까요?

아마도 우리는 인형뽑기 게임하듯이 마음에 드는 인형이 나올 때까지 그 기계 앞을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언제나 열려 있으니 언제나 되돌아갈 수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활짝 열려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우리의 얼마남지 않은 수고로움 마저 매정하게 취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퇴직 30일을 앞두고 내 뒤로 닫힌 문과 내 앞에 열리지 않는 문을 헤아려 봅니다.

3년 전에 이사 선임에서 어이없게 고배를 마신 일은 닫혀진 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100여 꼭지의 글을 써 올려도 아직 출간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열리지 않은 문 중의 하나이겠고요.

그때 제가 이사가 되었다면 그 일을 제대로 감당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지만, 글을 쓰는 작가의 문을 두드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과거와 미래 사이, 닫힌 문과 열리지 않은 문 사이에 서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추억으로 봉인되었고, 닫힌 문은 제 것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압니다.

그러니 이제 열리지 않은 문, 미래의 문을 두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저는 아무 문이나 두들기다 먼저 열리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제가 열고 싶은 문 앞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작가의 문, 1인기업가의 문, 나무와 꽃이 춤을 추는 문, 오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말갛게 새어 나오는 문을 여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주1) 파커 J. 파머(홍윤주 옮김)의 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에서 인용했습니다.

주2) 제임스 홀리스의 저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에 나오는 개념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맡아 온 역할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라는 내면의 질문이 올라오는 때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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