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은 '나'에게 돌아가는 통과의례

생계의 2모작이 아니라 삶의 2모작

by 나오나무

저는 올해 말에 정년 퇴직합니다.

물론 더 다니고 싶지요.

하지만 정년이 찼으니 조용히 물러나야 합니다.

정년 퇴직에는 임기를 성실히 채웠다는 수고와 새로운 환경에 맞서야 하는 위기가 함께 담겨 있기에 저는 아직도 정년 퇴직한 선배들을 맘껏 축하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행복하시라, 꽃길만 걸으시라 하는 흔한 덕담도 버벅거리곤 합니다.

그들이 퇴직 후 맞닥트릴 차가운 현실을 어렴풋이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지진은 누적된 응력이 임계점을 넘어설 때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지진은 불안정과 변화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40대를 통과하는 사람에게도 마음의 지진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중간항로’라고 말하는 이 시기의 위기감은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성격과 '자기'의 욕구 사이에 무시무시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시작됩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나 사회의 말대로 살아온 삶에 균열이 생기면서 ‘나는 괜찮은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지요. 균열과 의문, 불안이 뒤섞이면 삶의 지진이 됩니다.


정년 퇴직을 앞둔 사람에게는 강진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이룬 성취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명함으로 설명되던 사람이 명함을 빼앗기게 됩니다.

정규직 끝, 일용직으로 다시 시작해야 처지가 됩니다.

주위의 기대와 시선도 영 불편합니다.

게다가 앞으로는 청장년이 아니라 노인으로 분류될 공산이 높습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지진으로 나타나 삶을 세차게 흔들어 놓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본인이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니 가족이나 지인들은 더 모를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 그 사람은 괜찮을 거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겠지요.

실제로 퇴직을 앞둔 사람의 내면에서는 불안, 우울, 강박과 같은 지각변동이 발생합니다.


꿈자리는 뒤숭숭하고, 언뜻언뜻 찾아오는 불안하고 허전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불안정한 상태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탈출구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혼란한 상태를 스스로 지켜보는 과정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고 탐색하는 힘이 생길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퇴직을 앞둔 저는 어쩌다 마음이 덜컹할 때가 있습니다.

달리던 차가 움푹 팬 웅덩이를 지날 때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선술집의 에어 풍선 간판에 현혹되듯이 은퇴, 인생 2막, 재취업, 노후생활비와 같은 기사 제목에 쉽게 낚이곤 합니다.


최근에는 “은퇴(retire)는 타이어(tire)를 바꿔 끼고(re) 다시 달리는 시기”라는 기사에 눈길이 갔습니다.

출처가 모호한 이 표현은 간지나게 역동적이고 멋져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자본주의적 사고가 농축된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이 멋진 말에는 은퇴하는 사람의 삶을 일방적으로 규정짓고 강요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느낌입니다.

30년 동안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려왔는데, 경주마처럼 또다시 달리라고?

이제는 타이어를 버리고, 가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왔던 그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면 안 되나?

30여 년 동안 험한 길을 쉼 없이 달려온 타이어가 온전할 리 없습니다.

혹시 겉은 멀쩡할지라도 속은 많이 손상됐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차를 멈추고 타이어를 교체해야 하는 시점이 바로 퇴직(은퇴) 전후인 셈입니다.


나이를 먹는 일은 내게 닥쳐야 비로소 실감하듯이 퇴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퇴직하는 선배들의 하소연이 별로 공감되지 않았지요.

그러니 그분들의 당부를 귀에 담아 듣지 못했고, 막연하다고 여기던 미래가 막상 눈앞에 닥치니까 가슴이 철렁하더군요.

아마 여러분도 저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자의든 타의든 타이어를 바꿔 끼워야 하는 시간이 언젠가는 반드시 옵니다.

그때 성급하게 타이어를 교체하려 하기보다는 닳아빠진 타이어를 매만져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타이어가 지나온 길과 시간, 고통과 수고를 충분히 회상하면서요.

되돌아본다는 것은 뒤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앞길을 내다보려는 의식이니까요.


퇴직 이후에도 이전처럼 계속 달리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당사자의 마음은 아우토반을 달리고도 남겠지만 육체와 반응 감각은 타이어만큼이나 닳았을 테니 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간혹 피치 못할 사정도 있겠지요. 그러나 개인적이나 사회적으로 계속 달리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요?

설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최선인지 의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나이에 걸맞은 삶의 성숙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달리려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돈이 있어야 젊음과 자존감, 안락을 계속 구매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돈이 부족하면 자기 자신을 실패자로 낙인찍습니다.


진짜 문제는 계속 돈을 벌려는 생각의 밑바닥에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겠다는 자본주의적 인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시각에서는 생계의 이모작은 가능하지만 자기 삶의 이모작은 불가능합니다.

자기만의 생생한 스토리를 만들 기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허감과 외로움이 채워지는 인생후반부의 모습은 어떻겠는지요?


고전인문학자 고미숙 씨는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직업을 다시 얻어 사회적으로 진출하는 일이 아니고, 혈연과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공동체 전체의 비전과 자기 존재의 근원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거창하고 비현실적인 말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열심히 일한 그대, 이제 그대가 진정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그곳으로 가도 좋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로도 읽힙니다.

시간이 없어서, 책임질 사람이 있어서, 돈이 필요해서 같은 온갖 핑계로 미루어 왔던 곳, 그대가 그냥 가고 싶었던 곳을 선택하면 됩니다.


길이 정해지면 그 길에 적합한 타이어를 고르는 일은 쉽습니다.

공동체와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가는 길에는 저속용 타이어나 자전거 바퀴가 어울릴 수도 있고, 간혹 바퀴를 버리고 두 발로 걸어가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렴 어떨까요. 우리가 정한 목적지에 이르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테니.


퇴직을 앞둔 제 마음은 여러모로 복잡합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 에리히 프롬에게 받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더 미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소유 말고 존재요’



*인용한 책은 제임스 홀리스의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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