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장'처럼 (하)

짠한 샐러리맨에서 영웅이 되기까지

by 나오나무


#5. 뼈 때리는 질문 하나


이 드라마는 중년이면 꼭 맞닥트릴 수밖에 없는 원초적 질문 하나를 던져줍니다.

극 중 김부장의 모습에서도 엿보이지만, 드라마의 원작자인 송희구 작가는 그 질문을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어떤 회사에 무슨 부서에 무슨 직급 누구, 이게 만약에 없어지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쉽게 말하자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직장이 나의 전부인 사람에게는 직장이 없어지는 순간 ‘나’도 사라지게 됩니다.

중도 퇴직자들이 회사를 원망하거나 분노하고, 심지어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막다른 선택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직장이 있을 때, 특히 직장에서 잘 나갈 때는‘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굳이 내가 누구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나를 괜찮게 알아봐 주니까요.

퇴직 후 6개월에서 1년 정도 지나면 직장에서 형성된 인간관계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제 경험치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위대한 대기업의 ‘김부장’은 퇴직 후 1년이 지나면 물에 젖은 신문지 뭉치 같은 처량한 신세가 될 게 뻔합니다.

게다가 ‘김부장’의 자부심은 ‘이젠 불러주는 사람도 없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패배감으로 바뀌어서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인정받고 싶은 ‘김부장’에서 자기다운 삶을 찾고 싶은 ‘김 아무개’로 삶이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정년이 연장되니까 이러한 인생 질문을 더 미루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말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정년이 연장되는 만큼 당신의 기대수명도 늘어난다고요. 결국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 들지 않습니다.’


#6. 조연같은 주인공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칭 ‘위대한 인생’이라고 자부하던 김부장이 버림받고, 사기를 당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도 다시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아내 박하진이 옆에 있어서라는 것을요.
아내의 연민이 없었으면 김부장은 끝까지 실패한 사람으로 남았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상대를 연민하는 사람이야말로 조연같은 진짜 주인공입니다.

김부장은 그래도 행운아입니다.
짠한 남자를 끝끝내 품어주는 아내를 두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달리 매몰찹니다.
가족을 부양한다는 사명감으로 죽자 살자 회사 일에 매달렸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 가족에게서 멀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외감과 절망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은퇴 이후 부부 관계가 나빠지는 경우는 더 흔하게 발생합니다.
비로소 부부가 함께할 시간은 많아졌는데 오히려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한 상황이 된 것이지요.
대화나 공동 관심사가 부족한 것도 이유이지만, '부부가 서로의 삶의 방식을 얼마나 인정하고 존중하는가?'에서 근본 원인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부부는 수평적,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김부장은 고통을 겪으면서 이런 관계의 의미를 깨달았기에 아내의 손을 잡고 걸으며 "왜 이리 사랑스럽냐"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7. 통과 의례

전업 작가인 제 지인은 주인공 김부장이 갑자기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바뀌어서 황당하고 실망했다고 합니다.
냉정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을 듣고 묘하게도 비이성적인 '신화 Myth'가 떠올랐습니다.
스스로는 위대했지만, 아내에게는 짠한, 시청자에게는 위태롭게 보였던 김부장은 퇴직하고 나서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바뀌는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회사를 원망하고 백상무에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퇴직금과 은행 대출금을 사기당해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비참한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일어섭니다.
대리 운전기사를 뛰고, 자존심까지 굽히며 자기가 다니던 회사의 지하 주차장에서 세차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백상무와 도부장에게 연민을 갖고, 과거의 '김부장'과 화해하고 결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수겸이를 응원하고,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맨발로 걸으며 행복해 합니다.

그는 과거의 '김부장'을 내려놓고 새로운 '자기'를 만났습니다.
명함과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나서야 인간 김낙수를 찾은 것입니다.
저는 김낙수가 겪은 삶의 여정이야말로 현대판 신화神話 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신화속의 영웅의 여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까요.

결과적으로 김낙수에게 퇴직은 영웅의 관문, 즉 통과의례였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던 퇴직이 그가 새 사람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 것도 흥미롭습니다.
성인식이 육체적, 사회적 통과의례라면,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에게 퇴직은 성숙한 인간이 깊은 삶을 찾아가는 인격적 통과의례로 작용한 것입니다.

'김부장'은 퇴직이라는 통과의례를 감동적으로 수행한 월급쟁이의 신화적 모델입니다.
우리 직장인은 직급과 연봉만 다를 뿐, 누구나 another 김부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퇴직=노후준비(재취업)' 라는 자본주의적 시각에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김부장은 폭풍처럼 들이닥친 통과의례를 어렵사리 치러냈지만, 우리는 퇴직이라는 통과의례를 조금 일찍 준비한다면 삶의 균열과 불협화음의 고통도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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