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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호 Jun 15. 2023

007 작전

회사가 금기한 노동조합을 만들다

이율배반. 이 말 밖에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날마다 지역사회에 공정과 정의, 사회의 진보를 외치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조그마한 틈이라도 발견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물어뜯어 버린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지 못하는, 아니 들이대지 않는 그 거대한 모순 속에 우리가 있었다.


업력 30여 년의 인천경기지역 언론사. ‘기호일보’. 적잖은 시간만큼 나름의 영향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미래’나 ‘성장’, ‘혁신’의 가치를 찾기 어려웠다. 경직되고 구태한 체제 속에 오로지 현실만 좇기 바빴다.


휴일에 무급으로 행사에 동원되고, 상사의 기분에 따라 출퇴근 방식이 달라지고, 일부 출입처를 소수 간부들이 장기간 독식하고, 연차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점심시간을 보장받지 못하고, 담당 업무보다 과외 업무로 인해 압박을 받고, 상사의 부당한 지시와 모욕적 언행을 견디는 등의 퇴행적 시스템은 작은 문제였다.


오랜 시간 고여 썩어버린 내부에서는 불법과 탈법은 횡행했고, 관행이라는 말 앞에 더 큰 문제들이 묵인되고 감춰졌다. ‘언론’이라는 알량한 타이틀을 앞세운 끝 모를 오만함이 부패를 가속화했다.


그 속에서 일부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또 다른 일부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아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선배’라 불리는 일부 인간들은 뭐 대단한 일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모든 것이 추억이고 로망이라며 지껄여댔다. 그렇게 썩고 또 썩어갔다.


답답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문제를 공론화하고 개혁하자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처음에는 우리도 주저했다.


어릴 적부터 ‘고발’을 ‘고자질’이라는 부정적 단어로 치환해 교육받았던 트라우마 때문일까? 자칫 전인격적 관계의 파탄까지 감내해야 하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모험이기 때문일까? ‘아침을 여는 신문’. 이런 우리가 과연 누군가의 아침을 활짝 열어 줄 자격이나 될까?


하지만 그 주저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썩은 병폐의 고름이 터진 것이다. 


이는 우리의 투쟁심에 기름을 붓고 사내 민주화, 지역언론 개혁의 의지를 촉발시켰다. 바로 사장과 당시 재직 중이었던 사업국장이 연루된 ‘인천시 보조금 횡령 사건’이다. 


5억 원 규모의 횡령사건으로 2018년 12월 사장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사업국장은 구속 기소돼 1년 넘게 실형을 살다 2심에서 감형돼 나왔다. 


당시 재판부는 사장이 20년 넘게 지역 언론인으로 활동한 사실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억울하다던 사장은 항소심을 포기했다. ‘억울한 사람들은 항소를 하는데 왜 안 할까?’ 항간에는 2심에서 실형이 나올까 두려워 항소를 포기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새롭게 노조를 설립하자고 처음 제안했던 건 이창호였다.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이창호는 2014년 기호일보 입사 후 기자 활동을 해오며 발전과 개선 없이 굳어버린 조직문화와 회사 내부 부조리에 염증을 느껴왔다. 


이창호는 정치·경제부 기자들과 접촉해 은밀히 노조 설립 추진을 논의했다. 노조를 설립한다는 소문이 돌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 OB선배들이 만들었던 기호일보 노조가 사측에 의해 무참히 와해돼버린 일이 있었다. 당시 노조 와해에 최선봉이었던 사장(당시 상무)은 매우 저열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당시 노조원을 압박하고 끝내 노조를 갈기갈기 찢어발겨놨다.


지금에 와서 노조가 다시 생겨날 수 있다는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면 시작조차 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노조 설립은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듯 조용히 진행돼야만 했다. 정치·경제부 소속 기자들 간의 합의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이창호는 이 사실을 사회·문화·체육부 소속 기자들에게도 알렸다. 


최근까지 부위원장을 맡은 A만 찬성했다. 노조 설립에 부정적인 의견을 낸 당시 사회부 소속 기자였던 B를 반드시 설득해야만 했다. 단순하게는 노조 설립에 필요한 노조원을 모집한다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B가 끝내 반대를 하는 경우 찬성했던 나머지 노조원들마저 입장이 곤궁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창호와 함께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정치·경제부 소속 기자 C가 설득을 위해 수 차례 B를 접촉했다. 하지만 B는 계속해서 노조 설립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B를 다섯 번째 만나 설득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창호와 C는 마지막 설득을 한 후 반대 입장을 지속할 경우 B를 제외하고 노조 설립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얼마 후 B를 설득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B는 노조 설립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여섯 번째 이뤄진 만남에서 B는 갑작스럽게 입장을 선회해 찬성의 뜻을 밝혔다.


노조 설립에 찬성한 기자들은 B의 입장 번복에 의문을 가졌지만,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그 의구심을 뒤로한 채 노조 설립에 속도를 붙였다.


본격적인 노조 설립을 위한 움직임 속에 노조위원장을 누가 할 것이냐를 두고 기자들 간에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노조 설립을 먼저 제안한 이창호에게 노조위원장직을 맡기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B가 노조위원장을 맡겠다 자청했다.


B는 "이창호와 C는 결혼도 했고 처자식이 있으니, 혼자인 내가 하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새로운 기호일보노조의 초대 집행부는 노조위원장 B, 정책국장(부위원장) C, 사무국장 이창호, 복지부장 A, 회계감사 홍봄 등 5명이 맡기로 결정됐다.


007 작전처럼 5명은 조용히 움직였다. C가 규약을 다듬었고 A, 홍봄이 창립총회를 준비했다.


취재로써, 또 기사로써 적잖게 참석하고 또 접해 왔던 창립총회였다. ‘아무개 단체가 창립총회를 열었다’와 같은 문장을 쓰는 행위는 너무나도 쉬웠다.


하지만 그 문장이 ‘나의 일’이 되는 순간 우리는 갓 걸음마를 뗀 아이와도 같았다. 장소를 섭외하고 준비물을 챙기는 과정은 어색하기도, 어설프기도 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을 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 노조를 만든다니!


집행부가 구성되고 노조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5명은 노조 규약을 다듬고 창립총회를 준비했다. 마침내 인천 구월동의 한 상가 내 공간을 빌려 간소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식순을 적고 노조설립 안건을 심의했다. 


노조위원장과 집행부 선출 투표 절차를 마치고 노조 설립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드디어 십수 년간 죽어있던 노조의 심장이 다시 뛰고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창호, 홍봄, A, C가 창립총회에서 정관을 살펴보고 있다.

모든 직원들이 보다 선진적인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회사 내부의 모든 폐단을 개혁하고 혁신하기 위한 우리의 강력한 총포탄이자 든든한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기쁨에 얼싸안고 환호했다. 그렇게 2019년 2월 21일 우리는 중부고용노동청에 노조 설립을 신고했다.


조합이 설립된 후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우리는 조합 이름으로 창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노조의 나아갈 방향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창립선언서 발표의 파장은 컸다. 지역사회 곳곳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지만, 회사 내부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장과 당시 편집국장은 근무 도중 창립선언서를 확인하고는 회사를 박차고 나갔다. 편집국장의 얼굴빛은 더욱 붉그락푸르락했다. 이창호가 "근무 중인데 갑자기 어딜 가십니까?"라며 나가려던 편집국장을 붙잡았다.


편집국장은 이창호에게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아느냐? 창립선언서를 보면 한창원은 비리나 저지르고 직원들 연차도 못 가게 하는 파렴치범이고, 나는 부동산 개발에만 빠져 돈보고 기사 쓰는 사람이 됐다"라고 답했다. 이창호의 당시 회상이다. 


함께 회사를 뛰쳐나갔던 사장과 편집국장은 며칠 후 다시 돌아왔다.


직원들에게 노조에 대한 회사의 반감과 적개심을 보여 준 하나의 퍼포먼스로 느껴졌다. 그 저변엔 노조에 참여하면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깔려 있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두 사람은 노조 설립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논의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노조가 정식 출범하자, 노조원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취재기자를 비롯해 편집기자와 지역 주재기자까지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노조에 가담했다. 하지만 일부 주재기자들은 경영진의 압박 때문인지 얼마 안 가, 노조를 나가버리기도 했다.


기호일보노조는 2005년 전국언론노동조합 기호일보분회로 활동한 선배들을 계승한다. 창립선언서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4가지를 꼭 지키겠노라 했다.


- 하나. 우리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지역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공정보도와 기울어지지 않은 편집권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 하나. 우리는 지역사회와의 단결과 연대를 통해 기호일보 가족들의 경제·사회적 지위 향상과 권익 보호 및 신장을 위해 앞장설 것입니다.

- 하나. 우리는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언론역사의 대의적 흐름을 계승해 기호일보 가족들의 가장 가까운 소통창구이자 벗으로 민주적이고 균형 잡힌 조직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 하나, 우리는 급변하는 언론환경에 대응하고 생존하기 위한 전략을 찾는 데 있어 회사와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하고, 화합과 상생, 노사가 발전하는 모델을 찾는데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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