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이 날 무렵부터 아버지는 택시운전사였고 그 회사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다. 아버지 때는 조합장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10년쯤 노동운동을 더한 뒤 개인택시를 받았다. 그러면서 위원장직을 내려놓은 걸로 기억한다.
2014년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 한 동안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라는 가사를 들으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조합원이 500명쯤 됐다고 했다. 아버지의 허풍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봤지만 어렸을 적, 어머니가 김밥 400줄 싸는 걸 옆에서 지켜본 기억이 있으니 허풍은 아닌 듯하다.
내가 위원장을 맡았을 때 조합원은 10여 명이었다. 투쟁을 시작하자 5명이 됐고 ‘독수리 오 형제’ 체제가 수년간 이어졌다.
대학시절 아버지는 내가 변호사로 성장하길 바랐다. 나는 "변호사가 아니면 어때, 민주노총에 들어가 노동자들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말한 적 있다. 어쨌든 아버지와 약속은 지킨 셈(?)이다. 민주노총 인천지역일반노조 분회장이 됐으니 말이다.
500대 5지만 아버지와 나는 노조위원장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생겼다. 다른 점은 직업이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사였고 나는 기자다. 조합을 창립한다고, 위원장을 맡는다고 아버지에게 말하면 "사측이 많이 괴롭힐 텐데, 기자생활도 힘들 텐데"라고 걱정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언론사 노조위원장이라고 하면 "사측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느냐, 또 사측과 협상도 수월하겠다"라고 예상했다.
기호일보는 반대였다. 아버지처럼 조합원이 수백 명에 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호일보노동조합’이라는 딱지만 붙으면 밟으려 들었다.
<그래도 가보겠습니다>는 애초 ‘독수리 오 형제’가 함께 집필하려고 했다. 동지 2명이 부담스러워했다. 나머지 3명(이창호·우제성·홍봄) 이 글을 쓰기로 했고 가장 신경 쓴 점은 ‘쉽게 작성하자’였다.
책이 완성되고 보니 ‘우리끼리 재밌다, 잘 썼다’라고 말할 정도는 됐으나 기호일보노조를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어려웠다.
‘직장갑질 연대기’는 우리가 한 노동운동을 사례 중심으로 쉽게 읽히게 바꾸는 작업을 한다. 이 안에는 직장 내 괴롭힘, 노동위원회 구제 신청, 노동법 위반 신고, 내부고발, 삭발식 등 노동운동 방법이 총 정리돼 있다.
감히 ‘노동운동 백과’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