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싱사 어머니가 모은 아들의 신문
<그래도 가보겠습니다> 표지 안에 내 소개가 나온다. ‘택시운전사 아버지, 미싱사 어머니 사이 태어났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돕자는 일념으로 대학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정직기간 뉴스타파 저널리즘스쿨(1기)을 수료했다’고 쓰여 있다.
내가 사짜(?) 부모 아래 태어났다고 하는 이유다.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겪었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미싱사 일을 잠시 쉬었다.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를 보면 아버지의 택시회사, 어머니가 다니던 미싱회사 기록이 남아 있다.
내가 초등학교 2∼3학년쯤 어머니는 이모와 집에 작은 미싱회사를 차렸다. 작은방에 미싱 2대를 놓고 가죽을 재단해 박음질을 했다. 어머니는 사회생활 처음부터 봉제회사에서 미싱을 배웠고 그 일을 하다 아버지를 만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장래희망을 쓰는 란에 ‘변호사’라고 적었다. 지금 생각하면 둘 다 노동자로 살면서 바라본 변호사의 삶이 좋아 보였던 것 같다.
나는 변호사가 되지 못했고 ‘억울한 사람을 돕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찾은 답이 ‘기자’였다. 그래서 "너는 기자가 왜 됐냐"는 질문에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억울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라고 말한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가난한 사람보다 가진 사람들(공무원, 기업가 등 지역언론 카르텔에 들어온 이들)을 더 많이 대변했다. 신문사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노동운동을 통해 사내 민주화가 이뤄져야 약자를 대변하는 일이 가능했고 권력, 자본을 감시한 기사를 보도할 수 있었다.
지역사회 카르텔은 공고했다. 정치인, 관료, 기업가 등 힘과 돈을 가진 사람들의 비리를 취재하면 데스크, 편집국장, 사장으로 이어지는 라인에 연락이 갔다. 이들은 부탁, 설득, 강압 등의 이름으로 기자를 눌렀고 기사는 보도되지 않았다. 자괴감은 물론, 어머니에게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내가 기호일보에 들어간 뒤 얼마 동안 신문을 모았다. 아들 이름이 나오는 신문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취재한 기사는 압력에 의해 잘리고 보도자료로 쓴 기사만 나가는 걸 어머니는 몰랐다.
<그래도 가보겠습니다>는 어머니가 자랑스러워 한 아들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지낸 수년간 이야기가 담겼다. 이제 프로필 소개를 마치고 그 이야기들을 만나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