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펫, 노 키즈

보호자의 책임

by 익호


나는 카페를 좋아한다. 처음 먹는 커피의 맛은 쓴 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차분하게 앉아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며 각자의 테이블에 집중하는 카페의 분위기가 커피의 쓴 맛을 중화시켜 주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커피의 맛이자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다.


카페는 일상과 동떨어진 공간이다. 거리를 메우던 소음도 사람들도 카페 안에 들어가면 사라진다. 저마다의 컨셉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카페라면 그 비현실성은 더욱 살아난다. 내 몸에 다닥다닥 붙은 현실감을 커피 한 잔이면 떼어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훌륭하고 가성비 좋은 힐링인가.


그래서 나는 무강이와 함께 하는 산책에도 카페를 자주 찾는다. 여름엔 더위를 떨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겨울엔 추위를 떨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똑같은 메뉴지만 언제 마셔도 좋았다. 아침마다 커피를 꼭 마시던 습관에도 산책길 카페 방문은 즐거운 루틴이 되었다.


처음엔 카페를 간다는 생각도 감히 하지 못했었다. 공원 벤치에서도 1분을 못 버티는 무강이에게 카페는 더욱 답답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 이상 카페는 무강이에게 극복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여행지에서 휴식은 아주 중요하다. 이동만 가득한 일정에 카페에 앉아 한숨 돌리는 일은 서로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여행지 특유의 감성과 인테리어가 가득한 카페를 안 갈 수 없다. 무강이와 함께하는 여행도 마찬가지다. 무강이를 위한 일정이 있다면 나를 위한 일정도 있어야 했다. 그 여행은 신혼여행이기 때문이다.


절대 포기 못하는 카페를 위하여 무강이를 카페에 적응시켜야 했다. 내가 앉아서 커피를 홀짝거릴 수 있는 만큼 가만히 있어주는 게 목표였다. 일단 무강이에게 카페라는 공간이 익숙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동네에 반려견 동반 카페를 찾아야 하는데 거기서부터 일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는 음식점에 동물이 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여긴다. 동물은 당연히 실내 영업장소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 상식이었다. 반려동물의 출입은 철저히 사장의 재량이었다. 문전박대를 당해도 나는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려견 동반 카페를, 그것도 17킬로그램 이상의 대형견을 받아주는 곳을 찾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다행히 집 근처에 카페에서 대형견 동반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걸음을 옮겼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낯선 사람한테 짖으면 어떡하지. 낯선 장소에서 똥오줌을 지리면 어떡하지. 온갖 걱정이 난무했지만 일단 실행해봐야 실패도 할 수 있었다.


단골카페 VIP 멍멍이


걱정과 달리 무강이는 카페를 잘 즐겨주었다. 사장님은 무강이에게 간식을 한주먹씩 선사하고 손님들도 예뻐해 주었다. 이젠 스스로 카페를 가자고 줄을 끌기도 한다. 그렇게 매일같이 카페에 들러 예행연습을 마치고 제주도로 향했다. 반려견 동반 장소 목록도 작성했다. 가서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우린 제주도에서 식당보다 숙소밥을 더 많이 먹었다. 무강이는 혼자 차에 있어야 하는 시간도 많았다. 반려견 동반 식당 인증을 받았다고 써놓은 식당은 무강이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손님이 아무도 없어도 우리는 환영받지 못했다.


반려견 동반식당 인증 팻말이 희끄무레하게 바랜 식당을 뒤로 하며, 우리는 사정이 있었겠지, 뭔가 일이 있었을거야, 하는 추측만 되풀이했다. 어떻게든 그 식당의 입장을 이해해야 우리의 문전박대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점심, 우리는 무강이를 차에 두고 뜨거운 국밥을 마시듯이 들이켰다.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했던 곳이 어느 순간 노펫 공간이 되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그렇게 바꿀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상상한다. 최대한 그 사정을 이해하고 가늠해보려 노력한다. 그리고 무강이의 목줄을 더욱 단단히 붙잡는다. 모든 원인이 개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은 보호자의 책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노펫 이전에 노키즈가 있었다. 노펫은 공기처럼 당연해서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면 노키즈는 새로운 차별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관광지나 요즘 주목받고 있는 핫한 장소에 가면 노키즈 문구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사에서나 보던 일이 눈 앞에 현실로 닥치고 있다.


아이와 동물 모두 이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실수는 당연하다. 어른이라면 이 미숙한 존재들을 보듬고 올바르게 훈육할 의무가 있다. No zone은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들과 연대책임을 진 결과로 보였다.


물론 그런 공간이 옳다는 건 아니다. 어떻게 되었든 공간의 출입에 차별을 두는 건 옳지 못하다. 다만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보통 Yes Kids zone 의 경우 반려동물까지 허용하는 곳이 많다. 어린이와 동물이 드나들면 그만큼 장소는 지저분하고 시끄러워 질 수 있다. 공간에 입장했다고 해서 거기서 마음대로 행동해도 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다. 미성숙한 존재들을 데리고 들어온 만큼 그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사회는 그런 사람을 보호자라고 부른다. 보호자의 책무는 개인적인 책임이 아니다. 개인의 잘못이 사회의 연대로 번져 차별을 낳을 수 있다.

노키즈존 역시 마찬가지다. 보호자는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장소의 규칙을 따르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아이와 동물에게 가르쳐야 한다. 무강이를 데리고 카페에 갔던 어느 날, 이미 다른 강아지가 있었다. 무강이는 그 강아지에게 짖었다. 나는 카페에서 바로 나왔다. 무강이는 규칙을 지키지 못했고, 나는 그걸 제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공간에 있을 권리는 없었다. 공간의 빗장을 열어준 사장의 아량에만 기대선 안된다.


노키즈는 시작이라는 말도 있다. 앞으로 노 시니어, 노 패런츠 등등 다양한 차별이 우리의 일상을 가로막을 것이다. 차별은 언제나 약자에게 먼저 닥친다. 아이와 동물을 넘어 다양한 약자의 일상이 제약을 받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연대책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극복해야 한다. 공기처럼 당연한 이 차별이 언젠가는 당연하게 사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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