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라고는 넘치는 시간과 커다란 생각주머니,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손이 전부인 6살.
그래서 사랑하는 이에게 할 수 있는 선물은 무궁무진하다.
둘째 율이는 그림이나 작은 미니어처 장식들을 자주선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찰흙 꽃을 받고 좋아하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율: 엄마, 나 쓸모 있지?
나: 응? 쓸모 있고 싶어?
율: 응! 쓸모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어.
나: 사랑받고 싶구나. 율이는 존재 자체가 사랑인데! 엄마한테 쓸모 있지 않아도 돼. 엄마는 율이를 언제나 사랑할 거야.
그러다가 옆에서 유튜브를 보며 방학 내내 놀고 있는 15살 아들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나: 박시야, 너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박시: 아니! 꼭 쓸모 있지 않아도 돼.
사회가 말하는 쓸모의 관점에서 박시의 인생을 바라보면 한숨이 나올 수 있다. 성적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에서 집안일을 열심히 돕는 것도 아니다. 코로나 때문에 친구들과 신나게 놀지도 못한다. 15살의 삶을 때우듯 살아가는 아이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란 잣대는 자존감을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트릴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 박시는 누구에게 쓸모 있기 위해 자신이 살고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나의 존재로 즐겁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세상은 덕을 보는 것이다. 세상의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고 상대의 평가에 절절매며 눈치 보는 삶을 살게 된다. 상대가 만족스러워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보낸 시간이 기쁘고 즐거웠으면 그만이다.
'박시야 어깨 좀 주물러봐. 아들 낳은 보람 좀 느껴보자.'는 남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하지만 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남편 말이 끝나자마자 '안마시키려고 널 낳은 것은 아니지만 어깨를 주물러 주면 시원하고 좋을 것 같다고 아빠가 부탁하는 거야. 부탁이니까 거절해도 돼'라고 바로 덧붙였다.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굳이걸고넘어지는 내가 유난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또는 자식한테 장난 삼아 그럴 수도 있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고 못마땅할 수도 있다.
아들 낳은 보람을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아이가 안마를 해준다면 그것은 정말 기꺼운 마음에서 하는 행동일 것이다. 기꺼운 마음 따윈 필요 없고 그냥 내 몸의 긴장을 풀어 주는 노동력을 원했다면 차라리 부탁인 척하지 말고 '이건 명령이야 거절하면 난 복수할 거야'라고 직접적으로 말해라.
보람이나 덕을 좀 보자는 애매한 말을 하며 안마를 해달라고 했다가 아이가 거절하면 자식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거나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저런 건 낳지 말았어야 하는 데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 복수나 협박이 아니면 무엇인가?
아이들은 그깟 안마에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을 듣게 된다.
박시는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러워하는 아빠를 돕고 싶은 마음으로 아빠의 부탁을 들어줬다.
살면서 거절해도 괜찮은 부탁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절하면 나쁜 놈이고 거절하면 친구도 아니고 거절하면 널 떠날 것이라는 강요를 부탁이라고 말한다. 그런 가짜 부탁은 앞으로 살면서 많이 만날 테니 집에서 만큼은 진짜 부탁을 만났으면 좋겠다.
박시가 쓸모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했을 때,나는
"박시야. 만약에 엄마가 곁에 없을 때 율이가 너에게 '쓸모 있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야'라는 말을 할지도 몰라. 그럼 네가 지금 한말 기억하고 있다가 꼭 다시 해줘.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