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안나는 사람
슬프고 외롭고 두려운 티 내지 않기
어른들이 어린 시절 나를 보면 늘 꺼내는 첫마디
어쩜 애가 이렇게 구김 없이 밝니~?
부모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른들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견해서 또는 안쓰러워서, 아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얘기 들이었겠지만 듣는 나는 더 밝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원래 나는 쾌활한 사람이다. 하지만 웃고 싶을 때 웃는 것과 어두워보이면 안되기 때문에 웃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웃고 싶을 때 웃는 사람은 슬플 때 울 수 있지만 웃어야 하기 때문에 웃는 사람은 슬픔이란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 화들짝 놀라서 감정을 내쫓기 바쁘기 때문이다. 눈물은 나의 불쌍함과 나약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고 그 눈물이 난 죽도록 싫었다. 불쌍함으로 사랑받고 싶지 않았고 나에겐 강력한 밝음이 있으므로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다.
왜 내겐 힘들 땐 어두워질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다고 모두 다 괜찮다고, 네 마음은 모두 옳은 것이니까 가짜로 웃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이가 없었을까? 30살이 다 돼서 만난 어른들은 이런 나를 보며 괜찮다가 아니라 병이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듣고 더 병이 생겼다.
어떤 강연에서 발레가 대단한 이유는 엄청나게 힘이 드는 자세와 동작을 하면서도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웃으며 해내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인생에서 힘들 때 티 안내는 사람은 박수와 인정을 받는다. 대신 마음의 병을 얻을 것이다. 한두 번 공연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여자라면 엄마라는 역할은 적어도 50년 이상 할 테고 결혼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사회생활이며 인간관계에서 수많은 역할들 안에서 산다. 그런데 그 긴 세월을 어떻게 티 내지 말고 버티라는 것인가? 그러다 한 번씩 무너진 나를 들키고 나면 죄책감과 수치심 때문에 힘들어하기 시작한다.
그냥 힘들 때 '나 지금 너무 힘들다'라고 얘기하면 곁에서 꼭 안아주면서 '힘들었지, 그래 힘들었겠어. ' 해주는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다. 왜 힘드냐고 지금 슬플 때가 아니라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먹 꼭 쥐고 다시 밖으로 나가라는 채찍질하지 말고. 너 힘드냐? 나도 힘들다 하소연하는 사람 말고. 부모니까, 사장이니까, 어른이니까 힘들면 안 된다는 저주 같은 말도 싫다.
인생은 공연이 아니다. 누군가가 써준 각본에 따라 움직이고 울고 웃으며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살아서 느끼고 티 내며 서로를 안아주는 사람, 나로 살고 싶다.
그리고 가끔씩 삶에서 가장 내면의 어린 나를 다시 만날 때면 그때 내가 듣지 못했던 말을 천천히 해준다.
'슬퍼해도 괜찮아. 무서워해도 괜찮아.'
더 이상 나를 안아줄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내가 가장 잘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