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은 학교들이 남녀공학으로 바뀌었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여중, 여고가 참 많았다. 남녀공학 다니는 아이들을 잠깐 부러워했던 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다니는 여중, 여고 만의 특별함이 좋기도 했다. 정말 싫은 한 가지만 빼면.
출처: 단디 뉴스
3년 동안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버스로 통학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숨 쉴 수 조차 없는 지옥 같은 버스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이유는 꼭 사람들이 많아서 힘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버스 안에는 우리와 늘 함께 타는 성추행범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성환이 오빠'라고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붙인 것도, 그 사람을 성병환자라고 부른 것도 참 무지하고 한심한 일이다. 과거의 경험이 괴로운 것은 과거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과거의 기억은 문득문득 나를 분통 터지게 한다. 분명 가해자가 나쁘다는 것, 성추행은 범죄고 그의 잘못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책망하게 된다. 내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죄책감이 아니라 하더라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생각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난 그 순간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피해자를 비난하는 말이나 뒷말로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괴롭다. 2차 가해는 당신의 생각을 사실처럼 포장해서 피해자의 마음에 심어 고통의 불씨를 만들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피해자의 마음에 기름을 붓는 짓이다. 성폭력 가해자와 다를 바가 없다.
'왜 매번 타는데도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친구들과 힘을 모아서 싸워볼걸, 버스기사 아저씨한테 말하면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커져가면 왜 그때 어른들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을까? 왜 밀지 말라고만 했을까?' 하는 생각에 또 화가 치민다. 자기 비난과 타인 비난, 세상 비난을 반복하다 마지막엔 다 지난 일이고 지금은 그때의 내가 아닌데 왜 이렇게 열을 올리고 있나 하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난다. '그 경험 덕에 성교육 시간에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많네.'라고 의미를 부여해보지만 '그냥 성교육 안 해도 좋으니 그날의 경험은 안 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끝난다.
아마도 그 끔찍한 경험을 어찌할 줄 몰랐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성추행범을 희화화하는 방법밖에 없었나 보다.
출처: 해리포터, 보카트를 무력화시키는 주문 - 리디큘러스
해리포터를 보면 상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변신하는 보카트가 나온다.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주문은 리디큘러스인데 내 마음속의 두려운 존재를 웃기게 변화시켜 사라지게 하는 마법이다.
우리가 만든 '성환이 오빠'는 우리에게 '리디큘러스' 였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괴물 같은 인간을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버스에서 자주 만났던 그 사람은 학생들이 많이 등교하는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하거나 아니면 추행을 위해 그냥 여행처럼 버스를 탔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딴 이유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 사이코 같은 인간이 내 버스에만 타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아줌마들이나 우리 학교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학교를 가는 날이면 안심이 됐다.
더 황당하고 화나는 것은 성추행범 중에는 같은 버스를 타고 가는 남학교 학생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얘기를 듣던 아이들은 말한다.
가만두면 안 돼 나 같으면 손목을 부러트릴 거야 신고하고 끝까지 쫓아서 잡아야지
그것이 허세인지, 정의로운 용기인지, 경험 부족에서 오는 비현실적 계획인지, 아니면 괴로운 경험을 했을 나의 과거에 보내는 아이들의 위로인지 모르겠지만 '가만 두면 안돼'라는 말에 힘이 났다.
그 당시 신고했다면, 친구들과 연대했다면, 다른 승객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더러워서 잡고 싶지도 않은 손을 잡고 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나의 3년이 달라졌을까?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나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더 무력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처하지 못한 나를 세워두고 하는 스스로의 비난은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만약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다시 중학생으로 돌아간다면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못한다. 또 그 당시로 돌아가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지금은 성인이고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진 상태며 삶의 경험들이 쌓여서 대처능력도 높다. 그래서 후회도 남는 것이고. 하지만 나의 모든 기억과 학습된 것들을 지우고 다시 중학생이 된다면 그때는 또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때는 성인지 감수성도 낮았고 성추행범을 신고해도 된다는 것을 몰랐으며 도움을 요청하거나 친구들과 힘을 모을 용기나 추행범과 맞서 싸울 깡도 없었다. 그냥 성인이 된 내가, 성교육을 하는 내가, 두 아이를 키우는 내가, 나의 과거를 돌아보며 하는 한탄일 뿐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기에 나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수업을 한다.
교육을 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배운 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해서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모두 성추행범의 잘못이고 주변에서 눈 감은 어른들의 잘못이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이 수업을 들었다면 다른 행동을 했을 수도 있다.
가장 먼저, 그 사람을 성환이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버스 안 추행범에 대해 공유했을 것이다.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한 선생님과 친구들이 힘을 모아 대처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며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다. 선생님은 이 사건을 공론화하기 위해 교무회의 때 말씀하셨을 것이고 사건을 알리는 가정통신문이 나갔을 것이며 이 사실을 안 부모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에 신고도 하고 버스 회사에도 연락해서 버스기사님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요청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예상한 대로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안될 것이라며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개인의 안타깝고 괴로운 사건에서 더 나아가 공동체의 위협으로 인지되는 순간, 변화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첫 시작이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위험요인이나 개인의 경계를 넘는 순간들을 빠르게 인지할 수 있다. 이것은 외부에서 벌어지는 범죄뿐 아니라 가까운 가족이나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성폭력 사건을 막는 안전장치가 된다. 그리고 나 또한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비폭력적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감수성이란?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
[표준 국어대사전]
느낌은 생각과 감정을 통해 나타난다. 어떤 생각을 하는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따라 다른 감정,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감수성이 학습을 통해 일시적으로 높아질 수는 있지만 삶에서 계속 노출되고 연습하지 않으면 다시 과거의 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감수성은 높아졌으나 행동의 변화까지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사회와 공동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믿음에 대해 재검토하며 수정하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교육이나 경험 안에서도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옆에서 옆구리를 찔러주고 말해줘도 모른다.
자신의 여행가방을 눈도 마주치지 않고 부하직원에게 밀어주는 행동 때문에 이슈가 됐던 노룩 패스. 이 행동으로 더 유명해진 국회의원이 한참 후에 기자와 편한 자리에서 대화하는 영상을 봤다.
내가 지금까지 국민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만드냐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맞는 말이라며 '두 사람이 정말 친한 사이여서 그럴 수도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떠든다'며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한 공간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우린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건을 던져주는 사이가 친한 사이라면 난 친하고 싶지 않다.
밀어준 여행 가방을 온몸을 구부려 종종걸음으로 받아가던 직원도 친하다고 생각할까? 친하다고 매번 같은 행동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괜찮은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 기자들이 많고 가족들이 그 모습을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또는 몸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날은 싫었을 수도 있다. 상대가 그 행동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아야 사과라도 할 텐데 얼굴을 보지 않았으니 상대의 경계를 넘은 행동인지 알 수조차 없다. 그것은 상대의 경계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그것은 친한 것이 아니다. 친하다는 것은 서로의 경계를 잘 알고 존중하는 것이며 혹시라도 경계를 침범했을 때 바로 사과할 수 있는 사이다. 친하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간섭과 통제, 협박, 조종이 이뤄져 오고 있는지 안다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친함과 존중은 늘 함께 해야 한다. 존중이 사라진 친밀함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권감수성이 낮으면 존중이 결여된 행동이라고 주변에서 계속 알려줘도 '별 것도 아닌 일'로 인식한다.
성인지 감수성이 낮으면 성폭력을 친밀함을 표현하며 사기를 북돋기 위한 '별 것 아닌 일'이라고 말한다.
상대가 낮은 감수성을 갖고 있다면 말해줘도 모를 것이다. 때로는 '진지충, 오버하지 마, 유난 떠네, 예민하게 굴지 마, 대충 살아'라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상대가 이상한 것이라며 뒤집어 씌우기도 한다. 그래도 흔들리지 말고 계속 말해줘라. 상대가 빨리 바뀌지 않아도 내 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너 지금 선 밟았어. 넘지 마.
그런데도 보란 듯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 힘과 권력을 이용해서 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때는 보호하는 힘과 나누는 힘, 연대하는 힘이 필요할 때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함께 할 사람을 찾아라.
함께 할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아서 의심이 드는 순간들이 올지 모른다. 그리고 혼자라는 생각에 슬퍼지며 무기력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혼자인 삶은 없다. 당신과 뜻을 함께하는 한 사람도 지금 당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사람 또한 당신을 영원히 만날 수 없으며 연결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거나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될 때면 나를 기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