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치마의 의미는 짧은 치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by 한희
누굴 꼬시려고 이렇게 입고 나왔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서라는 생각





저렇게 가리고 계단 올라갈 거면 뭐하러 짧은 치마를 입어?
봐달라고 입는 거 아니었어?




짧은 치마를 입은 것은 당신의 시선을 받고 싶어서라는 해석


이런 생각과 해석들은 성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으려는 노력들이다. 주변인들의 이런 노력들 덕에 가해자들은 뻔뻔한 가면을 벗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이 일을 경험했을 때는 그랬다.


21살, 휴강을 한 과목들이 있어서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낮이라 지하철은 한 산 했지만 앉을자리는 없어서 문 옆에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떤 남자가 내 옆에 섰다. 설곳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내 옆에 굳이 서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사람마다 편한 자리가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며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 남자가 자신의 몸을 기울여서 나한테 기대는 것이었다. 누군가 밀어서도 아니고 잠을 자고 있는 상황도 아닌데 이런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다. 성추행. 어린 시절부터 비슷한 경험이 많았던 나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난 급하게 옆칸으로 이동했다.


참 신기한 것은 20년도 넘는 오래전 일인데 참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성추행 사건들은 모두 생생하다. 그때 내 피부 위를 흐르던 공기의 온도, 바깥 풍경, 지하철의 소음, 그리고 그 소름 끼치는 느낌, 두려움으로 뛰던 심장의 두근거림은 잘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내 뇌가 그날의 사건을 생존과 연결된 주요 경험으로 기억시킨 듯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억은 옆칸으로 도망쳤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옆칸으로 이동했지만 그놈은 날 따라왔다. 그리고 다음 칸에서는 더 대담해졌다. 큰 전공서적을 들고 있어서 자유롭지 못한 내 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오른쪽 다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구로역에서 지하철이 멈췄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개찰구를 향해 뛰어갔다. 개찰구 앞에는 공익근무 요원들이 서있었다.





도와주세요. 이상한 사람이 쫓아와요






역무원실로 대피한 나는 역무원 아저씨한테 있었던 일을 모두 얘기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말했다.






이상하네 옷도 야하게 안 입었는데.






그 당시에는 역무원에게 보호받을 생각에 옳고 그름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만약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성교육 시간에 정자, 난자만 배우고 살아온 내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따져 물었을 리도 없다. 만약 내가 자기 발견의 영역에서 성을 다루지 않고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 역시도 그 날을 떠올리며 '난 야한 옷을 입지도 않았잖아! 정말 재수 없는 일이었어'라는 헛소리와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티와 청잠바, 긴 면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결백하다는 생각은 내가 짧은 치마에 민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면 당해도 싸다는 생각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무원들의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으며 나의 결백과 순수함을 긴 면바지로 증명하는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CCTV로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개찰구까지 쫓아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역무원들이 신분확인을 하라는 지시를 하자 공익근무요원들이 그에게 다가가 신분증을 요구했고 그들이 확인한 바로는 인 0 대학교 2학년이었다.


내가 신고하겠다고 경찰을 불러달라고 하자 역무원들이 말했다.

신고를 하면 경찰차를 그 사람과 함께 타고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아까 보니까 그 녀석 군대도 안 갔던데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남자에게 빨간 줄을 긋게 하면 취업도 못하고 결혼도 못할 수 있어. 그럼 모두 학생 책임인데 괜찮아요?


더 긴 내용의 막장드라마 속 대사가 계속됐지만 나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단 한 가지가 정말 두렵고 싫었다. 경찰을 부르면 같이 타고 경찰서까지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나를 주저하게 했다. 두려움에 떨며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던 중학생에서는 탈출했지만 하나같이 모순 투성이인 말을 듣고도 반문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냥 빨리 안전한 집에 가고 싶어서, 그 얼굴이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 옆에 앉기 싫어서 '신고하지 않겠다' 고 말했다.


그 사람은 풀려났다. 그리고 빨리 가던 길을 가라는 역무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플랫폼으로 갔다. 그리고 나와 역무원들은 그 사람이 떠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CCTV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3대의 열차를 그냥 보내던 그가 CCTV를 잠깐 올려다보더니 사각지대로 몸을 감췄다. 더 이상 그는 플랫폼에서 보이지 않았다.


역무원들은 그때서야 호들갑을 떨며 '저거 진짜 사이코였네. 풀어주면 안 됐었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역무원들이 다니는 길을 안내해주며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 꼭 택시 타고 바로 집으로 가라는 당부까지 하며 배웅하는 그들이 그땐 고마웠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도 고맙지 않다. 다만 나 혼자만 미성숙한 인간이 아니라 나와 함께한 모두가 모자란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에 조금 위안이 될 뿐이다. 얼마 후 이 일을 지인에게 얘기했더니 '그러니까 일찍 일찍 다녀'라는 말을 했다. 그렇게 모자란 인간 하나 더 추가.


출처: Lawrence journal world

벨기에의 성폭력 피해자 지원단체(CAW)는 ‘피해자의 복장이 강간을 불러일으켰다’는 잘못된 믿음에 반박하기 위해 ‘내 잘못인가요’(Is it my fault) 전시를 기획했다.


'피해자의 의상과 성폭행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짧은 치마는 그냥 짧은 치마다. 다른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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