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언니들에게서 들었던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를 물어보는 휴지 귀신 이야기 때문에 밤에 화장실 가기가 꺼려지고 꿈에도 가끔 나와서 무서웠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화장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 사건 이후 나는 화장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성형외과에서 상담실장으로 일할 때 일이다. 긴 상담이 끝나고 참고 있던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 변기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오른쪽 칸막이 아래에서 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부터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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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봤나? 설마 아니겠지? 내가 괜히 예민한 건가? 그래 아닐 거야...
라는 자기 의심을 쏟아내고 있을 때 나의 본능은 이 모든 생각들을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분명해, 넌 찍혔어
다행히 화장실 앞에는 평소 인사를 나누고 지냈던 직원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었다. 얼른 옷을 입고 사무실로 뛰어들어가서 화장실에 이상한 사람 있다고 도와달라고 외쳤다. 직원은 급하게 뛰어나와 화장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변기 위에 올라가서 아무도 없는 척 버티던 그 남자는 한참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딱 보기에도 앳되보이던 그 사람은 평소 내가 상상하던 범죄자의 이미지와 너무나 달랐다. 정말 이 사람이 맞나? 내가 잘못 잡았나?라는 생각을 할 만큼 상상과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여자 화장실 변기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점이었고 그것이 범죄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처벌의 시간. 병원으로 끌려온 남자를 본 원장은 자기가 발 벗고 나서서 사태를 수습해 주겠다고 했다.
남자는 23살, 휴가를 나온 일병이었다. 내무반 병장이 휴가를 나가는 자신에게 여성의 나체 사진을 촬영해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해서 자기는 어쩔 수 없이 촬영을 했다고 한다. 하나도 못 찍었다고 내가 첫 번째였다고 말했지만 난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근무하던 성형외과의 환자나 고객은 거의 대부분 여자였기 때문에 나 이외에도 피해자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층에도 화장실이 있는데 성형외과가 있는 이 층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라고 확신했다. 나는 손이 떨려서 볼 자신이 없었는데 핸드폰을 살펴본 사람들은 아무 사진도 없었다고 했다. 사진을 삭제하느라 시간을 끌었었나 보다.
원장님은 신분증을 빼앗고 병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버지와 함께 오라고 한 뒤 돌려보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만난 군인의 아버지는 날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 키워서 그렇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신고하시면 이 아이 영창 갑니다. 제가 다시 가르치겠습니다. 믿어주세요.
가슴이 저려왔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분노와 복수의 마음이 울고 있는 중년의 아버지를 보면서 조금씩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신고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원장님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걱정 말고 퇴근하라'라고 했고 일은 나 없이 그들끼리 마무리됐다. 경찰에 신고는 제대로 했는지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불법 촬영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퇴사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폭력 수업을 할 때면 아이들에게 군인의 불법 촬영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은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란다. 나를 찍었던 남자의 직업이나 특징에 대해 유추하게 하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맞춘 학생은 없다. 아이들이 많이 지목하는 범인은 병원 원장이다. '가해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놈이지.'라는 말을 해주고 싶지만 꾹꾹 참으며 아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일병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 병장의 지시가 아니었을 수 있다. 시킨다고 하는 놈도 같은 범죄자다. 그 일로 맞거나 괴롭힘을 당할 수 있지만 범죄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아이들은 탐정이나 범죄 심리학자가 된 것처럼 얘기하다가 '군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나라 지키는 사람이면 우리도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속상해 하기를 반복했다.
아이들은 직업, 나이, 성별과 상관없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는 수업시간에 많이 들어서 이미 알고 있다. 더 이상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은 범죄자가 불법 촬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23살 군인이 불법 촬영을 했다는 점을 믿을 수 없어했다. 믿고 싶지 않아 한다. 나도 믿고 싶지 않다.
모두 가해자의 범행 동기, 수법, 처벌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그게 중요해?
그럼요! 혼내줘야죠.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돌아다니면 안 돼요. 또 다른 사람 찍을 수 있어요.
왜 찍을 것 같아?
사이코라서요. 미친 사람, 범죄 자니까요.
그래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어. 하지만 불법 촬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잖아. 휴가 나온 군인, 수영자에 놀러 온 사람, 출근하던 회사원, 학교에 다니는 학생. 이 사람들이 모두 범죄 경력이 있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병이 있는 사람일까?
아니죠. 그래서 더 무서워요.
자신의 욕구를 채우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해. 생명은 장난감이 아니야. 이런 영상을 찍어서 파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
이런 걸 돈 주고 사서 보다니. 미친 거 맞네.
찍는 사람을 막는다고 범죄가 사라지지 않아. 사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이런 일은 계속되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찍지 않기 때문에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이 찍거나 본 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지. 용기는 영웅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야. 우리에게도 필요한단다. 악의 세력에서 세상을 구하는 아이언맨이나 슈퍼맨이 될 필요는 없어. 그냥 믿는 것을 실천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얘기해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면 돼. 피해자를 구하고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어. 그것을 잊지 말자.
이 이야기에 아주 중요한 사람이 빠졌는데 누군지 아니?
바로 피해자.
선생님은 공중 화장실을 갈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나.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래. 변기에 앉기 전 화장실 문 앞과 옆에 구멍을 찾고, 변기 주변을 둘러보며 옆칸 사람이 여자일까를 걱정해.
화장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가는 데 갈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 괴로워. 지금은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그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가지는 않는단다. 선생님이 화장실 갈 때마다 불편하다고 말하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그러더라.
'유난 떠네, 누가 찍는다고, 카메라 같은 거 없어. 그거 뉴스에나 나오는 흔하지 않은 일이야.
그리고 아줌마를 누가 찍어?'
누군가 비슷한 말을 하면 꼭 말해줘.
'우리 선생님이 경험했어요.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세요.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원하지 않는 촬영과 나이가 무슨 상관있죠? '
그리고 음란물을 보는 친구들이 있으면,
'하지 마, 그 안에 피해자가 있대. 그리고 그 영상들은 널 망가지게 해. 난 네가 망가지는 거 싫어.'
우리가 음란물을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아주 많다. 하지만 보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법 촬영이나 성착취 영상의 피해자들은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다. 거리를 걷고 지하철을 타고 화장실을 가고 옷 갈아입고 씻는 순간들을 일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예측이 가능한 것들이고 긴장이나 의심 없이 반복적으로 편안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 중 한 순간이 가해의 장소로 바뀌면 일상은 긴장의 순간들로 채워지고 그것은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당연하고 익숙하게 해왔던 것들이 모두 두려움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삶의 한 장면에서 가해자가 만들어낸 주도권의 박탈은 피해자의 인생 곳곳에서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그래서 불법 촬영은 몸을 다치게 하는 폭력이 아니라 사람의 삶과 영혼을 망가트리는 폭력이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 한 부분이 다른 사람의 요깃거리가 된다는 것,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는 것만큼 잔인한 일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