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나

내가 간혹 부족해 보여도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by 한희

사람은 누구나 못나 질 때가 있다.

못난 나와 실시간으로 함께 하며 괴로울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한참이 지나서 그때의 나를 생각하며 이불 킥을 하기도 한다.


뭐가 더 한심하고 비참하냐고 묻는다면 둘 다.


못남의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의 못남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기준을 세우고 나를 계속 맞춰보다가 갖게 되는 판단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 눈에는 뛰어나 보여도 정작 본인은 수많은 못난 나들과 함께 살고 있을 수도 있다. 반면 실수도 많고 하는 일마다 왜 저 모양 일까 하는 한숨을 자아내는 사람도 본인은 그것을 인간적이고 완벽하지 않은 자신의 매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못난 나'는 진짜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의식 없이 오랜 시간 같이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못난 나를 진짜로 믿게 된다. 그래서 가끔씩 못난 나는 '가짜'임을 알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하는 말은 소용없다. 꼭 내 마음에서 시작되고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어야 한다










아이들과 성교육을 하다 보면 학교 교실 안에서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만나는 순간이 많다. 나는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사례를 선택하고 교육과 연결될 때 수업에 생명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강의에서 봤어. 뉴스에서 봤어?라는 말보다는 '선생님이 며칠 전 한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이야, 지하철을 탔는데, 화장실에 갔는데'로 시작된다. 수업에서 내가 아닌 제3자의 사례를 얘기하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 내가 직접 경험한 사례를 공유했을 때 아이들에게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나와 내가 만났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안전하게 편집해서 사례를 구성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아이들과 빠르게 공감대 형성을 하게 해 주고 수업에서 다루는 내용이 먼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들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 내 지인이 경험한 아픈 경험이 되면 일이 되면 앞으로 폭력적인 상황에서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인성 교육을 통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선택지를 넓히고 나와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행동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규범이나 원칙만으로 성교육 수업을 하면 안 된다. 공동체는 규칙과 규율, 법 이전에 사람과의 관계가 우선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관심, 관찰, 공감을 훈련하지 않고 규칙을 내세우면 내가 친하지 않은, 관심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학생의 고통은 무시되기도 한다. 그래서 폭력이 없는 안전한 교실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를 경험하고 힘의 분배에 대해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수업에서 고통 받았던 타인을 만나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시간은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의 덮어뒀던 과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잊혔던 나의 경험들 속에서 불편하면 서도 대책 없이 당하고 있는 나, 성희롱 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나를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 왜 그렇게 밖에 행동하지 못했어!'라며 자책하고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라며 원망했다. 과거 경험 안에서 나는 이미 충분히 괴롭고 불행했는데 그 불쌍한 아이를 현재로 소환해서 또 혼내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지금도 여전히 못난 짓을 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고는 씁쓸해진다.


성교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을 경험한 얘기를 했더니 수업을 듣던 한 아이가 손을 든다.


'선생님, 그때 그런 경험들 때문에 성교육하시는 거예요?'


이 질문받기 전까지는 내 괴로웠던 경험을 돌아보고 공감해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나조차도 과거의 힘들었던 경험을 수업에 이용하고 있었다. 성교육을 하는 이유가 나를 성찰하고 성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난 질문에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



성교육 강사들 중에는 성폭력 피해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심리적인 고통을 제외하고 물리적인 피해만 보더라도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타인과 주관적인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겪은 것은 극악무도한 범죄 안에서 일어난 피해는 아니지만 일상에서 겪을 수도 있는 성폭력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고 사람을 무디게 만들어서 자신이 피해자인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힘을 비슷한 폭력을 주변인들에게 가하기도 한다. 뉴스에서 접하는 성폭력 범죄는 소수의 사람들을 크게 다치게 하지만 일상 속에 스며든 작은 성희롱이나 추행 등의 성폭력은 공동체의 구조안에서 가해자 없는 피해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누가 가해자로 변할지 모르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하고 결국에는 공동체를 해체한다.




내가 성교육을 하는 이유를 다시 질문받는다면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를 위해서 하는 거야.


저희를 위한 것이 아니고요?


응. 어린 시절 내가 하지 못했던 말, 행동들은 바꿀 수 없어. 그래서 그때 그 사람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지금이라도 하는 거지. 내가 하는 말은 너희들도 듣지만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은 바로 나야. 너희는 오늘 나를 한번 만나지만 난 매일 수업에서 나를 만나거든. 나한테 교육을 잘았받지. 앞으로 비슷한 일을 또 경험하게 되면 난 다르게 행동할 거야. 그리고 혹시라도 두려움에 못난 행동을 하더라도 혼내지 않고 말해줄 거야.







그럴 수 있어,
사람은 누구나 못나질 때가 있는 거야.







얘들아 고마워, 너희들이 앞에 있어줘서 내가 들을 수 있었어.


그리고 선생님의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도 배울 수 있었네. 우리는 이제 다르게 행동할 수 있어. 만약 배운 대로 행동해도, 또는 행동하지 못해서 상처 받는 순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모두 가해자의 책임이지 상처 받은 사람이 잘못한 것은 아니란다.

나의 주인은 누구라고 했지?


나요!


기억해!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건 힘들 때 가장 먼저 안아주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야.



당신은 채찍을 든 주인인가요? 아니면 힘들 때 가장 먼저 두 팔을 벌려 달려와서 안아주는 주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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