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우 가정 탐방기: 배우 조미령 편>(1955) ①
영화사가 노만 28
잡지 《영화세계》 기자 신분으로 명동에서 수많은 영화인들과 만난 노만은 이들과의 친분을 계기로 영화배우들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나눈 인터뷰 '명우 가정 탐방기'를 연재했다. 지난 11월호의 전창근에 이어 12월호에서는 배우 조미령과 그의 부군인 제작자 이철혁의 왕십리 자택을 직접 방문하여 나눈 인터뷰 기사를 수록한다. <푸로듀-서 '이철혁'씨와 현존한 춘향 '조미령' 여사의 보금자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기사 역시 'N기자'라는 필명으로 쓰여졌다. 여기에 나누어 소개한다.
잡지 《영화세계》 1955년 12월호 표지(좌)와 노만의 기사 <[명우 가정 탐방기] 푸로듀-서 '이철혁' 씨와 현존한 춘향 '조미령'여사의 보금자리를 찾아서>(우)
[명우 가정 탐방기] 푸로듀-서 '이철혁' 씨와 현존한 춘향 '조미령' 여사의 보금자리를 찾아서
N 기자
왕십리 중앙시장에서 남쪽으로 향해 더듬어 올라가다가 다시 동편 길로 바꾸어 들면 신축된 교회당이 서 있고 그 옆으로는 일본식의 작으마한 가옥이 몇 채 있다. 그 중에서 나무 판장이 물린 작으마한 대문이 있는 끝집이 바로 현존해있는 춘향 '조미령' 여사의 댁이다. 대문에는 부군되시는 제작자 '이철혁' 씨의 문패가 붙어있다.
일요일이 되어서인지 대문에 들어서자 조 여사는 빨래를 하고 계셨다. 작으마한 뜰 안 한편 구석에서 빨래를 하시던 조 여사는 반가히 맞아주시며 방으로 안내하신다. 남향 집으로 의외의 뜰안 한편에는 무배추가 무성하다. 그 가장자리는 코스모스 국화 등 화초가 만개해 있었다. 안내된 방은 두어칸으로 되어 보이는 마루방으로 한구석에는 책장이 놓여 있고 벽에는 조 여사의 사진이 걸려있고 '베라 에덴'의 사진도 있었다. 가운데 방인듯 양 쪽으로 작으마한 온돌방이있었다. 비록 크지는 않으나마 아담한 집이었다. 조 여사는 한복을 입으시고 나오시며 웬일인가 하시는 표정이었다.
기자는 슬적 시치미를 떼고 딴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이 선생님은 모 영화 제작 관꼐로 외출하셨고 댁에는 어린애 둘과 단 세 식구 분이었다.
내방의 목적이 어그러지기는 했으나 조 여사께 질문의 화살을 던졌다.
"배우되신 동기를 말씀해주십시오"
"동기랄 게 별로 없어요. 다만 제 언니가 무척 이런 방면에 취미가 있어서 동생을 한 번 이런 방면으로 출세시켜보리란 그 열심에서 극단 '청춘좌'에 입사시킨 데에 있다고 하겠어요"
"그때의 연령은"
"열네살이었어요. 나이가 어리니까 눈치만 보면서 지내게 됐었지요. 어데 지금 같이 그때의 환경이 그랬나요. 모두 어버이같이 엄했고 또 저같이 어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더했어요"
십오년전이라면 그때만 해도 배우란 광대로 취급받고 천시되던 때였으니 이러한 일은 드문 용단이라고 하겠다.
조 여사 자신도 여기에 정열을 기우리고 연마했기 때문에 그때 총독부에서 어린 사람에게 주는 연기상까지 받으셨던 것이다.
"그때 변기종 단장을 위시해서 좌원 삼십여명이 있었는데 참 재미있어요. 고생도 무척 했지만...... 그때는 모두 가족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더 좋았어요"
사실 그 시대의 연극운동이란 민족적인 감정에서 좀 더 순수했던 것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럼 영화계로 투신하신 동기는?"
"이규환 감독의 <해연>이 데뷰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여학생 역으로 일인이역을 맡았었지요. 이렇게 한 작품에 출연하게 된 것은 여러 분의 권고도 있고 해서 처음으로 해보니 색다른 맛이 있었어요"
"<해연>이래의 작품은?"
"이번 <춘향전>이 다음 작품에요. 그동안은 주로 집에서 살림을 하며 대때로 무대에 서는 정도였고요. 또 사변으로 피난 가서 무대생활한 이외에는 집에 있었어요"
"그럼 이번 <춘향전>에 출연하신 감상을 말씀해주십시요"
"참말 뜻밖이었어요. 처음 이 감독이나 회사 측에서는 춘향의 역에 신인을 쓰신다고 하셔서 그런줄만 알고 있었고 또 제 자신도 이 너무나 유명한 <춘향전>의 춘향 역을 무대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고 또 향단 역을 맡은 일도 있고 해서 춘향의 역이 제게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짜기 로케 떠날 무렵에 이 감독이 오셔서 이번 역을 맡어줘야 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여러번 주저도 했으나 승락을 해놓고 보니 과연 내가 이 역을 해낼가 하는 불안도 없지 않았어요. 로케 하러 가서 카메라 앞에 서고 보니 제 자신이 춘향이가 되려고 하기 보다는 역시 자신의 연기를 발휘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춘향이란 역에 구애하지 않고 제 연기를 했죠. 한 캇트 촬영이 끝날을때마다 요런 것은 요렇게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없지 않았고 도대체 춘향이를 맡았다는 것 조차 후회 났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도저히 제가 춘향이로는 맞지도 않고 꼭 향단의 역이 알맞았다는 생각이에요"
이렇게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 조 여사께서는
"하여튼 끝나고 보니 시원은 하면서도 근심이 많았어요. 의외로 대성공을 해서 춘향이로 불리우지만 역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그 작품에 있었다는 점이 컸어요. 어떤 뚜렷한 연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봐요"
하시며 한술을 더 뜨신다. 조 여사가 춘향으로 통칭되는 사실은 결코 <춘향전>이 한국고전소설의 걸작이란 점에서만 아닌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 역을 무난히 해내신 오직 그 연기력을 말해주고 잇는 사실인 것이다. 더욱 <해연> 이후 첫 작품이란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고 조 여사가 여기서 일약 스타-가 되신 경우는 마치 '쥬디. 가란드'가 <스타- 탄생>으로 인기와 스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한 점과 같다.
이때 밖에서 놀다 오는 듯 장남 동진 군이 들어온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닮은 동진 군은 올해 다섯 살이라 한다.
"결혼은 언제 하셨읍니까"
"제가 스무살 때에요. 미원(맏따님 이름)이가 일곱살이니까 칠년이 됐군요"
"연애결혼입니까"
"연애결혼도 아니고 중매결혼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해연>에 출연할 때 제 아버지가 제작을 맡아 보셨는데 여기서 서로 알게된 데서 주위의 사람의 권고로 된 셈이죠. 저 애 아버지는 무거우신 성격이라서 이렇다 할 연애도 못 해봤어요. 호호...... 요즘 사람들의 보면 어떤 때는 부러울 때도 있어요"
"결혼 전의 연애경험은"
"없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무대에 섰고 따라서 남자와 접촉은 물론 많았지만 친구처럼 여기게 됐어요. 그래선지 이렇다 할 경험은 없어요. 그러나 편지(연애편지?)는 참 많이 받았죠"
이렇게 말씀하시는 조 여사는 얼굴에 약간의 홍조를 띄우시며 미소로 넘기시는 품이 풋내기 사랑이라도 없지 않은 듯 하나 이상 실례는 않기로 했다.
(②에서 계속)
배우 조미령이 춘향 역으로 분한 이규환 감독의 영화 <춘향전>(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