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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춘사·1902~1937>(1970) ①

영화사가 노만 32

by 유창연

노만의 '나운규론'은 총 세 버전이 있다. 하나는, 영화계에서의 마지막 흔적으로 언급되는 1978년 한국영화학회 발간 학술지 <영상예술> 2호에 실린 「춘사 나운규의 인간과 작품활동」. 이 글은 1970년 8월 최완규가 발행하고 한양대 김남석 교수가 편집장이었던 <영화문화연구>에 실린 <영화작가론: 춘사 나운규>를 전재한 것이다. "한국 영화문화의 향상을 위한 학술연구지"(매일경제 1970.4.11)를 표방하고 창간된 이 잡지는 아쉽게도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었다. 이 잡지 창간에 즈음하여 '춘사영화상'이 처음 제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것과 맞물려 그의 나운규론은 의미가 크다.

두번째는, 1965년 인물한국사편찬위원회 편, 『인물한국사』에 실린 「은막의 개척자 나운규」이다. 약 10페이지 분량의 이 글 끝에는 약력이 나와있는데, 중앙대 강사로 소개되어있다. 노만은 회고를 통해 중앙대 출강 시점을 1960년대 후반 무렵이었을 것이라 언급한 바 있는데 이 글의 시점을 보면 1965년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글에는 그의 출생년도가 '1930년 생'으로 오기되어 있다.

세번째는, 1970년 신동아 1월호 부록으로 발간된 『한국근대인물백인선』에 수록된 <나운규: 춘사·1902~1937>이다. 한국 근대를 수놓은 각계 분야의 인물들의 약전을 모아놓은 이 책의 필자로 참여했다. 이후 같은 책이 여러 차례 다른 제목으로 재판을 발행하면서 이 글 또한 다시 수록된 바 있다. 여기에는 이 글을 총 두 차례에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잡지 신동아 1970년 1월호 부록 『한국근대인물백인선』(좌)과 노만의 나운규론(우)

나운규: 춘사·1902(광무6)~1937

노 만

(중앙대 문리대 강사, 영화사)


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북 회령에서 나형권의 6남매 중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나형권은 구한말의 군인으로 계급은 부교였다. 통칭 나부교였던 형권은 한일합방이 된 이후로눈, 한방의로 전향하여 중류생활의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 나운규 위로 민규, 시규, 두 형이 있었고, 아래로는 사규, 오규, 필규가 있었다.

춘사는 십오세 때 회령보통학교를 거쳐 신흥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졸업하기 전에 보흥여학교의 여학생 윤마리아와의 연애사건으로 졸업장을 받지 못한 채 1918년 간도의 명동중학교로 전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조혼의 풍습대로 열다섯살에 결혼했으나 연상의 아내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춘사는 작품 <들쥐>에서 윤마리아와 이루지 못한 사연을 제재로 그 꿈을 재현시키고 있다.

간도의 생활은 춘사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 주었다. 한일합방 이후, 망명객의 거점이었으며 이향, 실향민의 집결지인 명동중학은 사실상 독립군 양성소나 다름이 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춘사도 여기에 가담, 소위 제령위반으로 몸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듬해 명동중학도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고, 간도에서는 몸담을 곳이 없게 되자 로서아로 건너갔다. 정처 없는 방랑길에 춘사는 호구지책으로 로서아 백군에 입대했다. 인종차별과 학대에 못이겨, 그해 가을 두 사람의 한국 친구와 함께 탈영했다.

춘사는 그때 탈출 과정을 <나의 로서아 방랑기>로 잡지에 집필한 바 있지만, 며칠을 굶으며 도보로 훈춘을 거쳐 북간도로 향하였으나 수중에는 무일푼이었다.

그들은 갈증을 참을 수 없어 어느 농가에 들려 물을 얻어 마셨다. 로서아의 촌부는 그들이 먹은 유리컵을 쓰레기 통에 던져버리는 것을 보고 뼈저린 후회를 했다. 춘사는 이때의 일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체험으로 간직했다.

훈춘에서 춘사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무리한 생활로 춘사는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21년 춘사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상경, 중동중학에 입학했다. 이 시절에 그는 문학서적을 탐독했고 영화에 이끌려 매일같이 영화구경을 하며 메모하기도 했다. 영화에 뜻을 둔 것이 이때였다.

그러나 순탄하게 학업에면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은 길지 못했다. 그 이듬해 춘사는 일경에게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복역, 1923년 여름에 출옥하였다.

1923년 동아문화협회의 <춘향전>이 흥행에 성공하자, 극영화 제작에 박차를 가하여 이듬해에는 단성사 영화제작부가 설치되어 <장화홍련전>이 제작되었고 부산에서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발족했다. 일인의 투자로 이어진 이 회사는 공칭자본금 20만원대의 다규모로 스튜디오 및 자본도 갖춘 영화사였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상영하기 위해 일활 배급망과 제휴하여 출발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첫 작품은 <해의 비곡>이었다. 안종화, 이월화, 이채전, 이주경, 유영로, 이경손 등이 전속되어 있었고 일인 고좌관장(조선명 왕필렬)이 주관하고 있던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영화기업화를 위해 한국인 감독이 필오했다. 당시 '조선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한국사람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었으니 고좌관장이 왕필렬로 개명한 것은 당시 관객의 욕구에의한 결과였다.

<월하의 맹서>를 감독한 바 있는 윤백남을 초빙하게 된 것도 실제 한국인 작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춘사는 출옥 후 '예림회' 극단에서 잠시 인연을 맺은 바 있는 안종화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중요 이위치에 있음을 알게되자, 다시 계속하던 학업도 중단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 자격으로 입사하게 됐다. 이에 주인규, 김태진 등의 예림회 시절의 동료들이 입사해 있었다.

춘사는 영화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으나 연기자로서의 요건을 구비하지 있지 못했다. 작은 키에 목이 짧고 광대뼈가 나온,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용모였다.

춘사는 <운영전>에 데뷰했다. 한국 고전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윤백남 각본, 감독에 주연은 안종화, 김우연이었고 춘사는 엑스트라에 가까운 가마군으로 등장했다.

1925년 윤백남은 독자적으로 제작회사를 설립했다. 윤백남은 <운영전>을 끝내고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사퇴하고 상경했다. 그때 그와 행동을 같이하여 상경한 사람은 이경손을 비롯하여 일인 서천수양, 윤용갑, 김태진, 주인규, 나운규 등이었다.

백남프로덕숀의 <심청전>에서 춘사는 일약 주연급인 심봉사 역을 맡았다. 이경손 감독의 이 작품은 흥행에 실패하여 춘사의 열의에 찬 연기도 빛을 내지 못했다. 이어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가 이경손 각본, 감독으로 영화화되었으나 춘사는 적역을 얻지 못했고 오랜 제작시일에 결국 고려키네마 명의로 완성했다. 이어 조일제가 설립한 계림영화협회에 전 멤버가 참여하여 <장한몽>을 제작했으나 춘사에겐 이렇다 할 역할이 돌아오지 않아,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이탈하고 말았다.

1926년 일인 정(요도)가 조선키네마를 창립했다. 조선키네마의 운영은 진수수일이 담당하여 <농중조>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던 유행가의 영화화로 이규설 감독에 복혜숙, 이규설 주연, 나운규가 조연을 맡았다. 이 작품에서 나운규는 적역을 얻어 연기자로서 인정을 받았고 그 뛰어난 연기력에 모두 감탄했다. 춘사의 진면목을 보이게 되자 진수는 그 재능을 아끼게 되어, 명화 <아리랑>이 탄생한 계기가 됐다.

춘사는 북간도에서의 생활, 로서아 방랑시절 그리고 2년 가까운 형무소의 복역생활에서 얻어진 나라 없는 민족의 뼈아픈 시련을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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