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가 노만 33
(①에서 계속)
조선키네마의 제2회작으로 나운규의 <아리랑>이 결정되어 착수했다. 그러나 각본, 감독은 김창선이란 명의로 발표하게 됐으니, 김창선이란 바로 진수의 한국 이름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영화 검열이 가혹하여 조금이라도 민족 사상이 담긴 작품은 여지없이 절단 당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고유의 서정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울분으로 엮어진 <아리랑>이 햇빛을 보기 힘든 일이었다.
<아리랑>이 상징적 수법으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검열의 관문을 뚫고 일반에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유력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작품이었던 때문이다.
조선키네마는 춘사의 <아리랑>이 흥행적인 대성공을 거두자 그로 하여금 계속 작품 활동을 시켰다. <아리랑>으로 선풍적 인기 속에서 춘사는 각본, 감독, 주연을 독차지하여 영화계의 제1인자로 군림했다. 1926년 <아리랑> 이후 1929년의 <벙어리 삼룡>까지는 사실상 춘사 시대라고 할만큼 영화계는 나운규의 독무대였다.
특히 <들쥐>에서는 그의 어렸을때 부터의 친구 윤봉춘을 등장시켰고 또한 이 작품은 검열에 걸려 무려 1권이 잘려나가게 되었다. 개작하여 상영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영화사 측에서는 이로 인해 검열에 걸리지 않는 작품을 만들려고 춘사의 작품 활동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금붕어>가 바로 경영주와의 타협에서 만든 작품으로, 춘사의 둘도없는 친구 김용국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코믹.텃취의 영화였다. 그러나 <금붕어>는 춘사의 작풍에서 떨어지는 작품으로 흥행적으로 뒤떨어져, 결국 조선키네마와 결별을 하게 됐다.
1927년 조선키네마를 탈퇴, 독립하여 제작회사를 설립했다. 춘사와 행동을 같이한 인물은 이명우, 이창용의 기술진과 주삼손(일인), 이경손, 윤봉춘, 이금룡, 전옥, 김연실 등이며 이에 연기진이 가담했다.
나운규프로덕숀은 단성사의 후원으로 <잘있거라>에 이어 <옥녀>를 제작했다. 그리고 <사랑을 찾아서>는 조선키네마의 후원으로 제작했다.
춘사가 탈퇴한 후 조선키네마의 김태진 감독 <뿔빠진 황소>가 제작됐으나 춘사의 <잘있거라>와 경합, 흥행에 참패하자 다시 춘사로 하여금 조선키네마는 춘사의 작품 활동을 허용했다. 이 작품은 두만강에서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현지 촬영을 감행한 춘사의 야심작이었다. 그러나 검열에 걸려, 제목도 무려 세 번이나 바꿔야 할 만큼 만신창이가 됐다. 원래는 <두만강을 건너서>였으나 불온하다 하여 <저 강을 건너서>라고 개제케 했고 다시 검열 당국인 총독부 도서과에서 <사랑을 찾아서>라고 제명을 지어주었다. 이 검열 수난으로 춘사는 다시 조선키네마의 후원을 얻지 못한 채 <사나이>를 착수했다. 이 작품은 홍개명에게 연출을 맡기고 춘사는 출연만 했다.
이 무렵부터 춘사는 극심한 경제적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작품 활동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일 만큼 그는 의욕도 상실하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흥행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수입은 자본주에게 돌아가니 남는 것은 허탈감과 생활고 뿐이었다. 점차 작품 활동에 열의를 잃고 사생활도 무질서해졌다. <사나이>에 등장시킨 유신방과의 동거 생활로 촬영을 지연시키는가 하면 제작부원을 돌볼 생가도 하지 않았다.
춘사는 이어 <벙어리 삼룡>을 제작 착수했다. 이 작품은 1928년 12월에 촬영 완료하여 그 이듬해 정월에 개봉했다. 결국 나운규프로덕숀은 이 <벙어리 삼룡>을 마지막으로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상 영화제작을 할 수 없는 사회환경이었다.
1928년 여름 호남 지방의 유사 이래 가뭄과 관북 지망의 수재로 인해 식량 사정이 악화되고 사회는 불안정했다. 천재에 의해 모든 영화제작은 중단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프로덕숀을 해산한 이후의 춘사의 작풍은 완전히 전기와 구별된다. 무질서한 여성편력으로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더구나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한때는 지방 흥행 극단에 파묻혀 호구지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1930년부터 그가 사망한 1937년까지 약 8년간의 그의 작품 활동은 마지막 <오몽녀>를 빼놓고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1930년 <아리랑 후편>에 출연하고 이어 다음 해에는 <철인도>를 만들었으며 일인의 작품 <금강한>에도 출연했다.
1933년 들어서 김옥균의 삼일천하를 그린 <개화당이문>을 착수, 떨어진 명성을 되찾으려는 안간힘을 썼으나 실패, 이어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에 머리를 깎고 출연했다.
이어 다음해 <종로>를 발표했으나 <칠번통의 소사건>, <무화과>, <그림자>와 같은 졸작도 만들었다.
1935년에 들어서면서 <강건너 마을>을 발표했다. 전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리얼리즘의 세계로 파고들었으나 <아리랑>과 같은 강렬한 국제의식이 결여되어 공감하기는 미흡했다. 이어 발성영화 <아리랑 3편>을 발표했으나 실패했고, 그의 최후작 <오몽녀>만이 빛을 냈다. 발성영화 <오몽녀>는 어촌의 서민 생활을 그린 가작으로 이 시기부터 춘사의 사생활이나 작가적인 태도가 건실해지기 시작했다. 전기의 안하무인 격인 1인 3역을 도맡아 해내던 시기와는 달리 연출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병든 그의 육신은 작품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춘사 나운규는 1937년 8월 9일에 사망했다.
참고문헌
『한국영화측면비사』, 안종화 저(著),
<나의 로서아 탐방기>, 나운규 기(記), 《문예영화》,
『アジア映畵の創造及建設』, 市川彩 저(著),
<무성영화시대의 자전>, 이경손 기(記) ■
(《신동아》 편집실 편,『한국근대인물백인선: 《신동아》 1970년 1월호 부록』, 동아일보사, 1970, 304~3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