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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걸어온 형극의 길>(1963) ①

영화사가 노만 35

by 유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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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씨네마> 1963년 2월호 표지(좌)와 노만의 글 <한국영화가 걸어온 형극의 길>(우)


한국영화가 걸어온 형극의 길

- 오늘의 한국영화작가에게 보내는 참고문

魯 晩


이 땅에서 극영화가 생산된지도 어언 사십년- 일제 하에서 출발하여 해방을 맞았고 뒤이어 6.25 동란 - 사회 환경의 변화와 정치체제의 변경 속에서도 꾸준히 영화는 제작되었다. 그동안 발표된 작품이 무려 천여편을 헤아리게 됐다. 그러면 이렇게 많은 작품 중에서 한국영화의 전통을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분명히 전통의 단절은 아니다. 다만 정치, 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방으로 분산돼 있을 뿐이다. 분산된 상태- 이것은 곧 그 사회, 정치 체제에 적응하여 변형되어 갔던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약탈당하여 제한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 이십여년이었다. 그나마 검열이란 '가위'가 항상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 그러나 혼란이 앞섰고, 어느정도 정상적인 작품활동을 할 수 있을 때 6.25 동란- 이리하여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수난의 연속에, 작품의 내용 역시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우리가 흔히 대하는 '사랑의 이야기'도 예산로가 오늘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같은 '사랑'이라도 옛날엔 포옹 한 번, 키스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오날날엔 지극히 당연한 애정 표시의 한 방법이지만 이십년 전에만 하더라도 이것은 불가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영화의 발달일까, 인간의 발전일까, 사회의 진보일까- 하여튼 '사랑'도 변했다. 이런 한 가지의 변화로도 영화의 내용이 어떻게 변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연대에 따라 변해가는 한국의 영화 내용을 살펴가며, 오늘날의 영화와 비교하고 또 앞으로 어떠한 작품을 제작해야 하는가를 반성해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연쇄극과 극영화의 출발


1919년의 3.1운동은 한국문화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것은 일본총독부의 정책 변경에도 있겠지만, 당시 일반민중에게 크게 자극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극계는 소위 신파극단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이 신파극단의 연극은 거의 일본 삼류극의 번안이었고 또 무대장치도 모두가 일본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권선징오의 것이었다. 좀처럼 진전을 보여주지 않는 이 신파무대에 당시 관객은 점차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3.1운동으로 인하여 구태의연한 신파무대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신파운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당시 신파부문의 대표격인 극단이 임성구의 혁신단, 김도산의 신극좌, 김소랑의 취성좌, 이기세의 문예단 등이 있다. 이 4개 극단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으나 점차로 줄어드는 관객으로 인하여 타격을 받고 있었다.

김도산은 이 신파극의 구제책으로 일본에서 촬영기사를 초빙하여 연쇄극을 제작했다. 단성사의 관주였던 박승필의 재정적인 후원으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했다. 김도산의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게 된 커다란 이유는 당시 신극좌의 단원이 이기세의 문예단으로 들어가게 됨에 이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의 촬영기사 뿐만 아니라 '필림'을 비롯한 영화기계도 모두 일본에서 들여왔다. 그리하여 김도산 일행은 <의리적구투>란 신파극을 선택하여 약 천 피이트 기리의 연쇄극을 위한 촬영을 개시했다.

연쇄극이란 극과 극을 연결하는 장면을 무대에서 실연할 수 없는 것을 '필림'에 수록하여 연극과 함께 상영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의리적구투>는 장충단 고개를 비롯하여 망우리 고개에서 촬영되었는데, 이 작품을 감독한 사람은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덕경이었다. 일본 촬영기사의 통변을 그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를 모르는 김도산은 그와 의논하여 촬영했던 것이다. 이 촬영에 동원되었던 사람은 신극좌의 단원 이경환, 김영덕, 촤일, 양성현, 윤화 등을 비롯하여 당시의 멋쟁이 운전사 이기연 등이었다. 이기연은 당시 경성에 몇 대 밖에 없던 포오드 차를 가지고 명운전사로 이름이 났던 인물로 그 후 비행 조종사가 되어 <괴인의 정체>란 영화에도 특별출연한 바 있었다.

이 <의리적구투>의 연쇄극이 완성하여 단성사에서 상연을 하게 되었을 때, 여기서 소요된 제작비는 무려 천여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당시 삼십원이면 1개월간의 생활비로 충분한 금액이었으니 가히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단성사에서 상연하게 되자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곧 막대한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었고, 매일 단원들에게는 일당 삼십원이란 금액이 배당되었다. 이리하여 신극좌의 명성은 장안에 떨쳤고 연쇄극 붐을 형성하게 됐다.

여기에 <의리적 구토>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

송산(김도산)은 부자(최일)의 아들로 남부러운 것이 없다. 그러나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김영덕) 슬하에 있었다. 계모는 송산의 재산을 탐내게 된다. 계모는 영보(양성현)란 사나이와 짜고 본격적으로 재산 쟁탈전을 벌리게 된다. 이러한 가정환경을 증오하며 송산은 집을 나오고 만다. 추잡한 세상에서나마 뜻있게 살려고 한다. 그리하여 죽랑(이경환)과 매초(윤화)와 더불어 의형제를 맺는다.

한편 송산의 집에서는 계모 일당의 악의 무리들이 극악한 음모를 꾸민다. 그네들은 송산을 없애고 재산을 자기 수중으로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송산의 고민은 컸다. 가문의 명예와 부친의 위신을 돌보아 그네들과 정면 충돌을 피한다.

이러한 송산의 가정 내막을 알게 된 죽랑과 매초는 격분하여 의형 송산을 위하여 정의의 칼을 잡을 결의를 한다. 그러나 송산은 이들을 만류하여 매일같이 술 타령으로 지낸다. 그의 고민도 컸다. 더구나 의제들을 만류하느라고, '모든 것은 참아야 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동요하는 것은 남아의 취할 행동이 아니라'고 하며 이들을 제지한다.

드디어 최후의 날은 왔다. 계모 일당은 마지막 발악을 송산 일가에 감행하게 된다. 더 이상 자중할 수 없는 때임을 안 죽랑과 매초는 분연히 일어난다. 이들은 송산에게 만일 이 악당의 무리를 물리치지 못하면 자결할 각오를 했다고, 굳은 결의를 표명한다. 이리하여 송산은 눈물을 머금고 그 역시 칼을 잡는다. 결국 삼형제는 계모 일당을 추적하여 승리를 거둔다.

대략 이러한 내용의 이 작품은 확실히 한국적인 냄새보다도 일본의 어느 시대극을 연상케 한다. 이것이 그 당시 즐겨 무대화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이 연극은 당시 관객을 열광케 했으니, 삼형제의 연기에 열중했던 것이다. 특히 이 작품 중의 촬영된 부분은 삼형제가 계모 일당을 추적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약 천 피이트 길이의 '필림'에 나타나는 한국인(당시 조선인)들의 모습을 대한 관객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동안 외국영화만 대하던 당시의 관객은 한국 옷차림의 한국 사람이 스크린에 나타나니 감격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3.1운동이 일어난 직후라 그 감격은 더 했던 것이니, 한국도 외국에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어떤 자부심 조차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관객의 심리적인 비교가 곧 이 연쇄극의 성공을 약속했던 것이다.


(②에서 계속)


(잡지 <씨네마> 196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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