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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걸어온 형극의 길>(1963) ②

영화사가 노만 36

by 유창연
<춘향전>(1923,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한 장면


(①에서 계속)


이러한 연쇄극의 성공은 또한 극영화를 탄생케한 커다란 요소가 되었다. 즉 짧은 연쇄극에도 많은 관객이 있으니 더구나 장편영화를 제작했을 때는 더욱 성황을 이룰 것이란 예측이 섰던 것이다. 이리하여 극영화 <춘향전>이 나타났다. 이 <춘향전>은 오늘날까지 몇 차례나 영화화되어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등장했던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론 상혼(商魂)이 앞선 기획이었지만 춘향전은 오랜동안 한국 사람이 애독하여온 고대소설이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평민과 양반의 젊은 남녀의 사랑, 여기에 포악한 변학도의 등장, 춘향의 절개- 이 모든 것은 일제의 억압에서 빠져나오려던 관중에게 깊은 자극을 주었던 것이었다.

이 <춘향전>의 제작자며 각본 감독은 일본인 조천고주(早川孤舟, 하야카와 고슈)란 인물이었다. 한국 고유의 이야기를 일본인 손에 의해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은 씨니칼한 역사의 변전이긴 하지만, 여기에 어떤 두 민족의 대립보다는 상혼이 앞선 것이니 만큼, 제작자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조천고주는 황금연예관은 1918년에 증축하여 황금관으로 명칭을 개칭하면서 경영주로 등장한 인물이었다. 조천이란 흥행사는 연쇄극의 계속적인 성공을 보고 곧 동아문화협회란 제작회사를 설립하였다. 오늘날 국도극장의 전신인 황금관은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극장이었다. 그러나 경영주 조천은 당시 한국 관객의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고대소설 『춘향전』을 선택한 반면에 또한 무성영화시대의 생산의 위치해 있던 변사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또한 인기 절정의 기생(예기라고 했다)을 등용한 것은 조천의 상혼이 어떠한 것인가 짐작할 수 있다.

이몽룡의 역은 조선극장 주임 변사로 활약하던 김조성이었다. 이 김조성은 김춘광으로 그 후 극계에서도 활약하던 인물이었다. 춘향은 당시 경성오권번의 예기 한룡이었고 그 밖의 여성 출연자들도 모두가 기생들이었다. 물론 기생을 등용한 것은 여배우가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였지만, 이 예기란 기생들은 당시 극장의 무대를 빌려 그네들 독자적인 흥행을 하여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네들은 소위 기생학교인 권번에서 가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리하여 각기 자기 특징을 살려 무대에 섰던 것이다. 이러니 만큼 예기의 위치나 인기는 연극배우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춘향전>의 내용은 구태여 소개할 필요도 없겠다. 단지 이 작품이 막대한 흥행 성적을 올려 극영화의 성대한 출발을 하게 했다. 더구나 사극영화의 '붐'을 형성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춘향전>에 이어 <장화홍련전>, <해의 비곡>, <운영전> 등의 작품이 계속 발표되었다.


<운영전>


이 <운영전>은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 이후의 작품이었다. 오늘날 <월하의 맹서>를 한국 최초의 영화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선전영화에 불과한 것이니 만큼 극영화의 첫 작품으로 보기에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고 또한 3권에 해당하는 짧은 영화였다. 때문에 영화적인 의미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월하의 맹서>는 특히 윤백남이 조직한 민중극단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 제작에 착수했던 만큼 <운영전>에 비교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어쨌던 <운영전>은 당시 부산에서 설립되었던 제작회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제2회 작품으로 등장했다. 이 제작사 역시 일인 상좌관장(일명 왕필렬)에 의해 설립되어 제1회작 <해의 비곡>을 발표했던 것이다. 특히 이 회사는 이십만원 공칭자본금으로 설립되어 명실공히 최대회사로, 일본을 비롯하여 해외로 수출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제작 활동에 들어갔다. 윤백남도감독으로 초청되어 본격적인 영화 작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윤백남은 『운영전』이란 조선 고대소설을 각색하여 촬영 감독을 담당했다.

특히 이 작품의 배역 문제로 분쟁을 야기시켰던 사실이 있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는 이미 이월화란 당대 인기 여배우가 있었다. 이미 전작 <해의 비곡>에서도 주연한 바 있는 이월화는 <운영전>의 운영 역을 맡으려고 했다. 그러나 윤백남은 작품 성격상 적역이 아님을 강조하고 신인 김우연으로 하여금 그 역을 맡게 했다. 이에 분격한 이월화는 윤백남과 단판했다.

"어째 제가 적합하지 않다는 거에요. 마스크나 연기 면으로 봐도 제가 월등하잖아요? 더구나 경험도 있는데 만일 제게 운영 역을 맡겨주시지 않으면 전 이 회사를 그만두겠어요"

결국 이월화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아 월화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탈퇴하고 말았다. 당시 여배우 때문에 고심하뎐 영화계이니만큼 이 사건은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당시 이 회사에는 연기진에 안종화, 이월화, 이채전, 유영로, 이주경, 윤용갑, 이경손 등이 있었다. 이 <운영전> 촬영에 임하게 되었을 때 나운규가 입사하였다.

<운영전>은 이조 4대왕 세종대왕 시대가 배경이었다. 세종대왕께서는 여덟 분의 왕자가 계셨다. 그중 안평대군은 영특하여 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수한 전답과 재화를 주어 나이 13세 시 사궁 수성궁에 나와 거처하게 했다. 더구나 안평대군은 필법에 능하여 당대의 명필로 알려진 왕자였다.

"수성궁은 인왕산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안평대군(유영로)은이 사궁에서 시나 읊고 글씨를 쓰며 한가히 지낸다. 특히 그 당대의 문인재사를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어 재주를 겨누기도 했다. 집현전 학사를 비롯하여 많은 재사를 맞아 밤새우는 줄 모르고 담론하는 그런 분이었다.

이런 수성궁 안에는 많은 궁녀가 있었다. 안평대군은 그 중 나이 어린 궁녀 열 명을 뽑아 시문을 가르쳤다. 그 중에 운영(김우연)이와 소옥(이채전)이도 있었다. 안평대군은 이들을 몹씨 사랑하였으나 궁 안에 있게 하곤 바깥 사람과는 사귀지 못하게 했다. "시녀로서 한번이라도 궁 문을 나서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외인이 궁녀의 이름을 아는 자 있으면 그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김 진사란 나이 어린 선비가 대군을 뵈옵겠다 하옵니다"

대군은 기뻐 김 진사(안종화)를 맞아들였다. 김 진사는 나이 14세시에 등과하여 시문이 널리 알려진 재사였다. 대군은 궁녀를 내보내지 않은 채 김 진사에게 시 한수를 짓게 했다. 운영이로 하여금 먹을 가랑 벼루를 받들게 하니 두 사람은 서로 미소를 교환한다. 김 진사는 붓을 휘날릴 때 먹물이 운영의 손에 튄다.

"진실로 이른 바 천하의 기재로다. 어찌 서로 만나기가 늦었던고"

김 진사의 시를 본 대군은 칭찬하여 마지 않는다. 이리하여 그 후 자주 김진사가 이 수성궁에 드나들게 되었으나 그 후 다시는 궁녀를 대할 수 없었다.

어느듯 운영은 김 진사를 사모하게 되었고 김 진사 역시 운영을 사랑하게 되었다. 연모의 정을 풀 길 없는 운영은 어느날 벽 틈으로 김 진사에게 연모의 편지를 준다. 집에 돌아와 운영의 편지를 읽고 김 진사는 회답을 어떻게 전할까 망서린다. 그러던 중 하루는 동무에서 사는 무녀가 영이하고 수성궁에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편지를 전해주도록 부탁한다.

김 진사의 편지를 받아본 운영은 동복을 꾀어 무당집으로 가서 김 진사를 만난다. 그리하여 김 진사로 하여금 궁을 넘어 운영의 거처로 찾아 오도록 한다.

그러나 김 진사는 높은 담을 넘을 재주가 없었다. 근심에 잠겨 있을 때 김 진사가 가복 장이(이주경)가 그 내용을 알고 사다리를 만들어 준다. 이리하여 김 진사는 운영을 찾아 밤마다 정을 노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이틀- 대군의 눈을 피하려면 도망하는 길 밖에 없었다. 장이의 묘안으로 운영이의 패물들을 매일 담을 넘겨 산 속에 묻고 때만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던 중 장이는 재물에 눈이 어두어 김 진사를 속여 패물이 도적맞았다고 거짓을 고한다. 그러나 얼마 후 장이의 거짓말임을 알고 장이를 내쫓고 만다. 이에 분격한 장이는 김 진사와 운영의 사이를 폭로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운영은 대군에게 불려간다. 운영은 지금까지의 일을 낱낱이 고하고 목을 베어 자결한다. 그 뒤 김진사도 운영의 뒤를 따라가고 만다.


대강 이와 같은 내용이었던 <운영전>은 당시 관객에게 절찬을 받았다. 그러나 연출 수법을 비롯하여 촬영술 등이 미흡하여 화면 등이 선명치 못했다. 특히 템포는 말할 수 없었으니 영화 기법 상으로는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비로서 크로즈.업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당시 화면의 불선명함은 조명이 없이 촬영되었던 만큼 당연한 일이었고 또한 일인 촬영기사의 기술이 미숙했음에 있다.

특히 사극에서 템포의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도 논의되는 바지만, 그 당시 영화 수법으로는 템포가 느린 것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이 작품에서 김 진사가 걸어오는 장면을 촬영하는 데 한 숏트로 십여분이 소요되었다니 가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 이런 실패에 가까운 작품이 왜 관객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첫째 한국인의 손으로 완성된 작품이란 것과 둘째 당시의 관객 추이가 희극이나 액숀물에서 비극으로 돌아갔다는 데 있다. 즉 외국영화에서 비극적인 연애물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런 관객의 취향으로 이 작품이 흥행적 성공을 걷운 요인의 하나였다.

여기에 부기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1925년 1월에 개봉되었을 때 <총희의 연>으로 제명이 바뀌었다. (다음호 계속)

윤백남


(잡지 《씨네마》 1963년 2월호, 대한공론사, 1963, 5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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