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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Aug 15. 2024

<사극의 발생과 그 역사>(1962)

영화사가 노만 44

노만의 <사극의 발생과 그 역사>. 잡지 <씨네마> 1962년 12월호.


특집: 사극영화의 총정리

사극의 발생과 그 역사


노 만

(영화평론가)


  한국의 사극영화에서 일관된 전통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것은 오랜 동안 일제 하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출발이 식민지란 풍토에서 시작했기 문에 '자기 고유의 사상'은 담을 수가 없었고 그 비근한 것도 그려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환경 속에서 그래도 사극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가당착적인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만큼 외형적인 '고유'에 불과했다는 말도 된다. 이제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사십년이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단지 사극의 출발이 그 시대의 관객들 요구에 응해서 발생하지 않으면 안될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는 그런 의미에서 난마와 같은 사극의 역사를 그 시대의 환경과 비교하면서 더듬어 볼 수 밖에 없다.


사극의 발생과 그 이유


  엄격히 따져서 극영화의 출발은 사극으로서 비롯한다. 오늘날 우리가 극영화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일컫는 <월하의 맹서>(윤백남 연출)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영화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작품이 가지는 영화사적인 의의는 거의 없다.

  1923년에 공개된 <춘향전>은 일본인이 주관하고 있던 동아문화협회의 작품으로 제작, 각본, 감독, 촬영 등 일체가 일인들 손으로 완성된 영화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아문화협회라는 제작회사는 일인 조천고주라는 사람에 의해 최초 발생한 최초의 제작사였고 그곳에서 첫 작품으로 등장한 것이 <춘향전>이었으니 사극의 출발이나 극영화의 출발은 이 작품에 그 명예가 돌아갈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뒤이어 발표된 <장화홍련전>이야말로 한국인의 작품이었다. 제작을 비롯하여 촬영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국 사람의 손으로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에 나는 극영화의 출발은 사극으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영화 초창기에 속할 수 있는 1923년부터 1925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이 모두 한결같이 한국 고대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1923년에 <춘향전>, 1924년의 <장화홍련전>, 그리고 1926년도의 <운영전>, <흥부놀부전>, <심청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춘향전>(조천고주), <흥부놀부전>(김조성)이 동아문화협회의 작품이고 <장화홍련전>(박정현)이 단성사영화제작부, <운영전>(윤백남)이 일인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심청전>(이경손)이 백남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였다. 이 중 <장화홍련전>, <심청전>이 한국인이 경영하는 제작사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극이 제작하기 앞서, 사극을 제작해야 한다는 뚜렷는 작가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춘향전>이 흥행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관객의 절대적인 공감을 얻은 데 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춘향전> 이전을 살펴보기로 한다. <춘향전> 이전에는 극영화라는 것은 없었고 다만 조선총독부의 정책영화와 연쇄극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이 연쇄극이 한국에 등장한 것은 1919년 말기 신그괒란 신파극단이 신파극의 구제책으로 이용한데서 부터 시작된다. 1910년 신파극이 나타나면서 십년동안 극계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천편일률적인 내용에 지쳐버린 관객은 이 신파와 떨어지게 되자 이 연쇄극이란 것을 수입했던 것이다. 연쇄극이란 무대에서 실연할 수 없는 장면을 촬영하여 연극 도중에 그 촬영한 필림을 영사하여 연극을 계속시켰던 것이다. 최초의 연쇄극이 <의리적구투>라는 작품으로 제작비가 휘이트 당 1원이라는 고가로 약 천원이란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그 천원은 첫 공연에서 회수하게 되었다. 이로서 연쇄극 붐이 형성되었고 극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그러면 연쇄극의 성공은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그것이 곧 극영화로 출발하게 된 연유가 되는 것이다.

  당시 영화(외화)의 관객(한국인)은 처음으로 한국인이 스크린에 등장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짧은 것이긴 했지만, '한국 사람이 한국 옷차림으로 스크린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감격적인 것이었다. 즉 오랜동안 외국영화만을 대해오던 관객들은 처음으로 한국 사람을 대하게 됨으로써 그 발전에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객의 심리는 '억압당하고 있는 민족'의 서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의 여파는 한국인의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이것이 연쇄극의 성공의 중요한 키이 포인트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관객의 추이를 재빨리 팡가한 사람이 바로 황금관(현 국도극장)을 경영하고 있던 조천고주란 인물이었다. 조천은 극영화를 제작하기 앞서, 이러한 관객의 동향에 알맞는 소재는 한국 고대소설이라는 데 착안했던 것이다. 특히 <춘향전>은 누구나가 애독하고 있는 고대소설임에 제1작을 <춘향전>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춘향전>이 개봉관에 제작비를 회수하게 되자, <장화홍련전>, <운영전>을 제작하게 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은 연쇄극과 같이 관객에게 아필할 수 있다는 첫째 조건이 한국 사람이 스크린에 등장한다는 것과 둘째로는 한국의 고유한 이야기라는 데 있었다. 한국 사람의 등장과 한국 고유의 이야기라는 데서 그 당시 관객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시대적인 욕구였다. 즉 현대문명에서 뒤떨어져 나라를 잃은 그 울분이란 그 시대의 한국 국민에게는 거의 누구나 가지고 있던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비록 그런 사실을 뚜렷이 느끼고 있지 않고 있는 사람도 3.1운동 이후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독립투쟁의 깃빨에 민족적인 동족애라는 것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상해에는 대한임시정부의 각원 명단이 공포되었고 이로서 독립운동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국내에 독립투사를 잠입시켜 총독부의 중요 건물을 파괴하기도 했고 김익상과 같은 인물은 일인 장성에 폭탄을 던졌고 김상옥 열사는 경성 시내에서 일경 수십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전사한 사건이 이때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 밖에도 대소사건이 계속 잠자코 있는 민중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춘향전>과 같은 한국 전래의 이야기를 대하게 되었으니 이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화홍련전>과 같은 작품은 완전히 한국인의 손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작 각본 감독 촬영 주연자의 이름을 앞세워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특히 일본인은 연명까지 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사장이며 <해의 비곡>의 감독자인 고좌관장은 왕필렬이란 이름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익럿은 고좌관장이란 일본인이 아닌 왕필렬이란 한국인으로 행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렇게 조선이란 두 글자가 관객에게 아필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초기의 영화는 대부분 사극으로 등장하게 된 커다란 이유가 되었다.

  그 후 1926년에 발표된 <산채왕>이란 사극이 이경손의 감독으로 발표되었다. 이 <산채왕>은 고려말 홍건적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 이후 한국영화계에서 사극은 1년에 한 작품 정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계통없는 그 역사


  사극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영화계의 역사는 작품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차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것은 기술적인 면에서는 기법에 있어서나 모두 외국영화보다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첫째 촬영기사로는 모두가 일본인이 그 초기에 활약했는데 그네들의 기술이란 아주 졸렬한 것이었고 시설 부으로 화면의 불선명한데 있었다. 그리고 연출 면에서도 영화의 문법은 전연 모르는 연출가에 의해 작품이 생산되었기 문에 아주 느린 템포에 관객은 지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1926년 이후 관객은 '같은 값이면 외국영화를 보겠다'는 것이 정평이 되었다. 이리하여 사극에서 탈피하여 여러가지 형태의 작품 제작이 경주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에 한 작품 정도의 사극영화가 등장하기도 했고 전연 사극이 제작되지 않은 해도 있었다.

  1927년에 이규설 감독에 의해 <불망곡>이란 사극이 등장했으나 '영화검열'에 희생을 당하여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지나치게 잔인한 장면이 있다는 이유로 '가위질' 당하였고 재촬영하여 겨우 명맥을 이어갔던 작품이었다. 그 이듬해 이경손프로의 첫 작품 겸 마지막 작품이 된 <숙영낭자전>이 발표되었고 그 후 이렇다 할 작품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저조 일로를 걷고 있던 사극은 나운규의 <개화당이문>으로 다시 그 목을 일신했다. 1932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당 일파의 쿠데타로 소위 삼일천하를 이룩했던 데서 취재하여 영화화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개화당이문>도 이렇다 할 반향을 얻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그 후 사극의 면목을 세운 것이 한국영화가 토오키화 되면서 부터였다. 한국 최초의 토오키 영화인 <춘향전>이 1935년에 등장했다. 이필우와 이명우 형제의 노력으로 결정을 본 토오키는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하였으니 이 <춘향전>이야말로 한국여화에서는 빼놀 수 없는 위치를 확보해온 것이다. 이 <춘향전>으로 사그깅 다시 대두할듯 하였으나 <홍길동전>, <그 후의 이도령>, <홍길동전 후편>, <장화홍련전> 정도로 그 끝을 맺고 말았다.

  1937년에 들어서면서 오랜동안 삽화와 씨나리오 연기자로 활약하던 안석영의 감독으로 토오키 <심청전>이 나타났다.

  특히 이 해는 일제가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켜 영화계에도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것은 소위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한편, 전쟁으로 인하여 필름을 비롯한 영화 기재의 궁핍으로 정상적인 제작을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1945년까지 이렇다 할 사극영화는 전연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1940년부터 영화법이 시행되면서 영화가 국가 통제하에 들어가서 사극 뿐만 아니라 한국의 영화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으면서 영화도 해방의 감격에 뿔뿔이 헤어졌던 영화인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1948년부터 등장한 사극의 소재는 모두가 <안중근사기>(윤봉춘), <삼일혁명기>(이구영). <유관순>(윤봉춘) 등으로 근대로 그 시대를 옮겨왔다. 그것은 곧 오랜동안 '표현의 자유'를 잃고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울분을 자유로히 표현했던 데 있다. 민족의 수난을 해방의 감격과 함께 일제의 간악성을 여실히 묘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의 수난을 그린 이외에도 <고구려의 한>(임운학), <목단등기>(김소동)와 같은 사극이 등장했다.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잠시, 다시 6.25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간 어느정도 시설을 갖추었던 영화계는 6.25로 인하여 그나마 완전히 상실하고 피난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피난지에서 작품 활동이란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고 사극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화랑도>(홍춘)란 16미리 작품이 있었을 뿐이었다.

  1954년 3월 '국산영화의 면세 조치'란 특혜를 받아 영화계는 다시 활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극영화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이규환의 <춘향전>의 성공으로 사극영화 붐을 형성하였으니 <양산도>(김기영), <단종애사>(전창근), <구원의 정화>(이만흥), <망난이 비사>(김성민), <낙랑공주와 왕자호동>(김소동), <벼락감투>(홍일명) 등의 다양각색의 사극 작품이 등장하였다.


온실의 화초


  1960년부터 국산영화에도 과세가 됨으로서 무질서하던 작품의 등장이 어느정도 살아지면서, 4.19에 이어 5.16 혁명을 맞은 영화계는 잠시 사극이 뜸해졌다. 그러던 것이 색채, 대형으로 등장한 <성춘향>의 성공으로 사극 붐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극영화의 저조를 보이고 있는 현실이니, 그것은 사극의 새로운 해석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온 것이다. 사극에서 '과거의 현실', '현대의 현실'을 찾을 수 있는 데서 만이 사극영화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이 결여되었을 경우, 관객의 공명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사극의 영화는 저조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강 연대적으로 사극을 살펴봐도 사극의 등장은 그 사회 환경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창기에 사극을 제외하고 1935년까지 저조했던 것도 사회의 긴박감에서 또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한 데서였다. 그것이 <춘향전>으로 토오키화되면서 잠시 성행하는 듯도 싶었지만 의미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과 함게 근대적 사극의 등장, 다시 6.25로 자취를 감춘것 등 다분히 사회와 시대에 의해 좌우됨을 알 수 있다.

  무릇 예술이란 온실의 화초와 같은 것으로 '폭풍우'와 '추위'를 당하면 그 명맥을 이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사극은 더욱 따뜻한 온실이 있어야만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온실과 같은 사회에서만이 사극은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줌으로서 정상적인 사극이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의 뜻이다.


(잡지 <씨네마> 1962년 12월호, 46~49쪽)

첫 토키 영화인 <춘향전>(1935)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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