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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Aug 19. 2024

<한국영화배우변천사>(1964) ①

영화사가 노만 46

노만의 <한국영화배우변천사> (잡지 실버스크린 1964년 11월호) 

한국영화배우변천사

특집. 한국영화배우의 재평가

김도산에서 신성일까지  이월화에서 엄앵란까지


                                                                                                           노 만 (한양대 영화과 강사)


  짧으나마 사십여년의 역사를 지닌 이 나라 영화사도 그 언젠가는 수난의 역정을 되돌아 볼 한번쯤의 기회는 마련되야 했을 게다.

  무분별한 과도기에 처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영화사(韓國映畵史)가 그러하듯이 역사의 흐름 속에 변모해 가는 배우의 생태는 어떻게 발전해 온 것일까?

  떳다가는 잠시 광채를 지녔다가 그도 얼마가지 않아 떨어지는 별로 자취를 감추었던 숱한 배우들....

  이제 신성일, 엄앵란의 붐이 절정에 올라 그의 인기는 자못 비대하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무시할 수 없는 것. 달이 가고 해가 바뀌도록 그들의 인기는 영원할 것인지.....

  지난 날을 돌이켜 이 나라 배우의 변천 양상을 훑어 보려고 한다.


  배우의 등장은 극영화의 출현에서부터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극영화의 제작인 1923년부터였으니까 한국 배우의 출발은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점이 남게 되는데 그것은 1919년부터 성행한 연쇄극(連鎖劇)이다.

  물론 연쇄극이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화면에 분장하고 나타난 배우가 있다. 이 연쇄극은 신파극단 신극좌의 <의리적 구투>에서 비롯한다. 신극좌의 연쇄극은 당시 관객의 불신을 받아 위기에 놓였던 신파극의 구제책의 하나였다.

  이 연쇄극의 성공은 신파극단의 돌파구였으며 곧 연쇄극의 붐을 형성했다.

  신극좌의 김도산 일행과 혁신단의 박성구 일행 그리고 문예단 등이 이에 가세하였다. 당시 김도산 일행의 <의리적 구투>에는 이교환, 촤일, 강원순, 김영덕, 윤화 등이 출연했다. 박성구 일행의 <학생절의>, <친구의형살해> 등의 연쇄극에는 한창열, 강성열, 김기호, 박용구 등이 출연했고 문예단의 <황혼>, <지기>에는 안광우, 한철순, 이응수, 나효진, 윤상희 등이 경연했다.

  이 연쇄극의 배우들은 모두 무대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여배우는 한 사람도 출연을 못하고 있었다. 남배우로만 구성됐던 이러한 극단들의 연쇄극은 흥행극 영화가 제작하기 시작한 1923년까지 계속됐다.

  신파극단 배우가 스크린에 등장한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영화배우의 출발점이랄 수는 없다. 오직 전사적(前史的)인 의의가 있을 뿐이다. 이들의 스크린에서 연기나 분장 역시 신파 무대의 연장이었다.


여배우의 등장


  연쇄극의 붐이 한창일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정책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정책 영화는 3.1운동 이래 식민지정책의 변화로 인한 것으로, 일제의 정치를 한국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일제의 정치가 한국인을 위한 것이란 위장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정책영화의 하나로 제작된 작품이 <월하의 멩서>였다.

  1923년 공개된 이 <월하의 맹서>는 윤백남의 각본 감독 작품으로 민중극단 단원의 출연으로 완성된 것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 제작의 이 작품은 저축사상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윤백남이 이월화란 여배우를 등장시켰다.

  요염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이월화는 본시 간호부 출신이었다. 부산에서 여명극단에 입단 상경하여, 당시 혁신한 민중극단에 가담했다. 이때의 민중극단은 제1회 공연을 끝내고 재정난으로 안광우, 최일과 같은 신파 출신의 배우를 잃고 단원의 보강 등 혁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였다. 사실 윤백남이 영화를 하게 된 것도 민중극단의 재기책으로 체신국 의뢰의 <월하의 맹서>를 제작했던 것이다. 월화란 예명(본명은 정숙)도 이때 윤백남이 지어 주었으며 한국 최초의 여배우를 탄생케 했다. 그후 이월화는 <해의 비곡>에서도 주연을 맡아 당당 인기를 독점했었다. 그러나 같은 회사(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작품이며 윤백남의 두번째 감독 작품 <운영전>에서는 아깝게도 윤백남의 반대로 주역을 못맡고 영화계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월화와 함께 <해의 비곡>에 이채전이란 여배우가 있었으나 조연급에 속했고 대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윤백남은 그의 두번째 작품 <운영전>에서 이월화 대신에 신인을 등용했다. 김우연이었다. 역시 무대 출신의 신성으로 화려하게 데뷰했으나 김우연 역시 이 한 작품으로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개화당이문>(1923)에서의 윤봉춘, 나운규

(②에서 계속)


(잡지 실버스크린 196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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