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창연 Aug 12. 2024

<한국영화야사 韓國映畵野史 (제1회)>(1966)

영화사가 노만 41

잡지 <영화TV> 1966년 4월호(창간호)에 수록된 노만의 <한국영화야사> 제1회 연재분. 이 연재는 잡지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는 바람에 1회에 그쳤다.


한국영화야사 韓國映畵野史 <제1회>

- 활동사진시대의 이모저모 -


노 만

(영화평론가)


  I / 0

  한국영화정사(韓國映畵正史) 하나도 제대로 정리를 못하고 있는 주제에 야사(野史)부터 쓴다는 건 조금 이상한 이야기 같다.

  그러나 고대역사가 정사나 야사가 구별 할 수 없이 동일한 것 처럼 우리나라의 영화사도 초창기의 이야기는 정사인 동시에 야사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선 재미있는 이야길 펼쳐야 겠고 그러면서도 어떤 의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먼저 영화 수입 전후해서의 시기부터 더듬기로 했다.

  사실 영화가 류미에르 형제의 힘으로 1895년에 발명되어 전세계의 시장에 퍼지게 되었다지만, 이 시기의 우리 한국은 겨우 정사진기가 수입되었고 환등 정도가 외국 사신의 손으로 소개되었을 정도였다.

  이조 말기,고종황제 시대(광무 3년)에 접어들면서 사진관이 일인의 손으로 경영되고 있었다. 처음 사진기가 들어왔을 때는 목숨이 단축된다 해서 촬영을 피했다는 웃지못할 넌센스가 일어난 데 비해, 비약적인 발전이라 하겠다. 그러나 유성기를 가지고 흥행을 하고 있을 시기였고 경인철도가 개통되었고 청량리-경교(서대문)간 전차가 또한 등장했던 때였다. 그리고 전등이 가설되기 시작했다.

  유성기(레코드)는 흥행장을 설치하여 돈을 받고 감상하게 했다. 오늘날 음악감상실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나 그것은 과학의 힘으로 발명한 현대 문명의 이기로서, 그 경이의 대상에 불과했다.

  당시의 이 '유성기 팬'들은 유성기판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곳 저곳에서 '유성기흥행'은 성행하고 있었다.

  한성전기회사에서는 이 해(1899년) 5월 4일에 전차 시험 운행을 하여 그달 스무날부터 운행을 개시했다.

  그해 9월 중의 승객은 6만5천백49명이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19만3천여명이었다. 이와 같은 현대 문명의 이기에 접하기 시작하여, 개화에 박차를 가하는 시기에 영화는 출발했다.


  I / 1

  영화가 수입되기 전에는 외국인의 손으로 소개되는 환등이 일부에서 공개되고 있었다.

  1899년 말에 정동에 있던 '언더우드'가(家)에서는 구한말 정부 대관(大官) 측 주임관을 초대하여 다과회를 열면서 환등을 보여주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의 '배콕' 씨는 흥화학교 학생들을 초대하여 역시 다과회를 열고 '환등방'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관람하도록 하게 했다.

  그 이듬해인 1900년에 들어서서도 역시 이 환등은 사교의 매개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독일어 학교 교사였던 '불사안' 씨는 독일 공사와 각부 대신을 그 학교로 초청하여 환등회를 열었다. 서울서 뿐만 아니라, 이 '환등회'는 인천에서도 개최되었는데 일어학교 교사 嚴崎厚大郞씨에게 의해 인천 유지를 비롯하여 학생들을 초대하여 환등회를 열었다.

  이와 같이 환등이 비록 특정 인물들의 소유물이었다 해도, 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가고 있던 것 만은 사실이었다.

  1903년에 접어 들면서, 고종황제 즉위 40년이 되어 경식(慶式)을 가질 예정으로, 이에 대비하여 여러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협률사에서도 희대(戱臺)를 설치하여 일반 공개 공연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식을 못가지게 되자 협률사의 공연도 일시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 6월 동대문 내 한성전기회사에서는 회사 기계창에서 영화(당시엔 활동사진)를 공개했다. 그 내용은 비록 구미 각국의 도시나 명승지를 촬영한 것이었다. 입장료금은 동전 10전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보면 그 당시의 영화는 짧고 보잘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환등에도 흥미를 가졌던 시대라 '움직이는 사진'에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관객은 더욱 많아져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한편 한성전기회사에서는 전차 손님을 끌기 위한 방버으로 이 새로운 기계를 구입하여 흥행했던 것이 뜻밖에도 호평이었다. 관람객은 전차를 타고 동대문 전차 차고로 매일 몰려들었다.

  매일 저녁 입장료 만도 백여원(元)이 되었고 전차 요금 수입도 역연히 늘어난 것이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영화(활동사진)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새문안에 있던 협률사에서도 영사기 한 대를 구입하여 흥행하게 되었다.

  "오늘 저녁엔 새문안으로 가세"

  "아니 새문안에도......"

  "자네 아직 모르나? 협률사에서도 '팔동사진' 하는 걸......"

  이와 같은 대화가 오가는 관객이 많아졌고 활동사진을 팔동사진이라고 불리던 때였다.

  그해 칠월 칠일 협률사에서는 수백명이 관람하는 가운데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상영 도중 돌연 불이 일어났다. 영사 도중에 필림에 불이 붙은 때문이다. 화광이 방안에 가득하자 놀란 관객들은 서로 밀고 밟고 하여 다친 사람이 수십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넘어지며 옷이나 갓이 찢어진 사람,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진 사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튿날 아침에 땅에는 떨어진 단추나 신발이며 떨어진 동정, 옷고름 등이 즐비하게 쌓여 있었다.


  I / 2

  광무 9년(1905) 활동사진의 열(熱)이 높아지자 지방으로 순회하는 순회업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해 8월 부안군 줄포에서 일인 長谷川이 활동사진 순회 흥행을 열었다. '팔동사진'이란 경이적인 존재에 놀란 시골 사람들은 모여들기 시작했다.

  7, 8세의 꼬마들이 입장료를 내지 않고 모여들었다. 구경할 욕심에 몰려든 아동을 일본 사람은 무차별 몽둥이 찜질을 가했다. 그 가운데 어떤 애는 어깨가 깨어지는가 하면 등뼈가 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이 공짜 꼬마 손님들을 처치하기 위해 허리에 찼던 환도를 빼어 들어 휘두르는 바람에 어린애 하나가 잘못하여 머리가 터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태에 접어들자 격분한 시골 사람들은 사고를 이르킨 일본 사람을 잡아 군산 일본 영사에 넘겨주는 도리 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이 한국으로 이민해온 숫자는 날로 증가되었으니 1904년 통계에 의하면 3만명에 달하고 있었다.

  더욱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불상사는 너무나도 적은 일이었으나, 영화로 인한 사건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와 같은 사건에 반해, 한편 한국사람은 영화를 교육에 이용해보려던 움직임도 있었다.

  평양에 사는 김석봉(金錫鳳) 씨는 서양식 교육을 시키기 위해 대동학교(大同學校)를 설립했다. 그러나 뜻만이 앞섰지 그 경비를 지탱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몇 동지들의 힘을 빌려, 일본서 '활동사진기계'를 구입해서 교내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얻어지는 금액으로 학교 경영비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대부분 교육적 가치가 있는 내용과 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흥행, 오락 본위의 것에서 점차로 탈피하여 교육을 목적으로 상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있었다는 데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I / 3

  활동사진이 일반에 보급되면서 절찬을 받게 되자 활동사진 흥행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1906년에 접어들면서 동대문에 있던 전차 회사에서는 영미연초회사와 제휴하여 활동사진을 공개했다.

  이 영미연초회사는 1899년 인천에 공장을 건립하여 본격적인 담배 생산을 개시했다.

  당시의 담배는 자유 경쟁에 의한 상품이었기에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 수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 생산으로는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영미 담배는 '오로도' '히어로' '하니' '스윗하트' 등 고급질과 '북표' '붕어표' 등의 하급 권연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미 담배에서는 자기 회사 제품을 팔기 위한 수단으로 전차 회사와 제휴, 상품(上品) 담배는 빈갑 10개, 하품(下品) 담배는 20개의 빈 갑을 가져오는 손님에겐 무료 입장을 시키고 있었다. 상품 판매 수단으로 영화를 이용한 최초의 예가 될 것이다.


  I / 4

  그 당시는 오늘날처럼 흥행장인 상설관이 없었기 때문에 전기(前記)한 동대문 차고 새문안 협률사 정도를 빼곤, 활동사진열(熱)에 보답할 장소가 없었다.

  불란서인 마전(馬田)이란 사람은 자기 집에 활동사진관을 만들었다. 서대문으로 가는 신문(新門) 밖의 벽돌집에서 불란서 작품을 수입하여 상영하고 있었다.

  5백여환의 새로운 영사기를 구비하여 명창선무가동(名唱善舞歌童)을 동원하여 흥행에 핏치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입장료로 상등(上等) 하등(下等)으로 구별하고, 40전 20전을 받고 있었다.

  영화를 본격적으로 흥행한 사람이 바로 이 불란서 사람 마전(馬田)이었다.

  이에 앞서 사동(寺洞)에 살던 이징익(李徵翼) 씨는 자기 집에 영사기를 설치하고 활동사진을 일반 공개했다.

  그는 일찌기 군수까지 지낸 사람으로 활동사진에 미쳐 자기 집을 극장으로 제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 이 집에서는 사당 한 가운데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의 깊이가 수십 길이나 되었다.

  많은 사람이 운집하여 발 디딜 곳 조차 없게 되었다.

  그 가운데 관람하던 어린애가 잘못하여 그 우물에 빠져 죽은 사고가 일어났다. 이런 사고를 전후하여 우물가에 앉았던 사람들이 시계나 동전을 우물 속에 빠뜨렸든 예는 부지기수였다.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신문들은 활동사진에 대한 야유를 다음과 같이 했다.

  "해(該) 소년(少年)들은 연희장(演戱場)을 불위(不爲) 추수(追遂)하고 야학교(夜學校)에 입(入)하야 공과(工科)를 수학(修學)하얏스면 일신상(一身上) 이익(利益)뿐 아니라 전국내(全國內) 무항산(無恒産)한 인사(人士)를 권고(勸告)하야 여차무익(如此無益)한 연희장에 유유(遊遊)함을 계감(戒鑑)할 지어다" <次號 계속> ■


(잡지 <영화TV> 1966년 4월호(창간호), 문화예술사, 1966, 68~70쪽)

  

  

  

  

  

매거진의 이전글 <대작영화의 반성기는 왔다>(196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